이준희(사회11)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무더웠던 여름방학을 지나 나의 대학 2학년 2학기가 시작됐다. 그럭저럭 학교에 잘 적응하던, 아니 마치 ‘새내기’가 된 기분으로 학교를 누비던 나는 성대신문을 통해서 우리학교에 ‘남학생 휴게실’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사는 주로 남학생 휴게실과 여학생 휴게실의 시설을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우리학교에서 남학생 휴게실의 설치가 꽤나 논란거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오히려 여학생 휴게실의 존재가 논란거리였다고 하는게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로 “여학생 휴게실은 있는데 왜 남학생 휴게실은 없느냐”는 반감에 가까운 의문이 남학생 휴게실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 총학생회인 태평성대’는 선거 당시 이를 겨냥이라도 하듯 남학생 휴게실의 설치를 공약으로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학생 휴게실은 왜 필요한가? 여학생 휴게실 설치를 주장한 ‘그녀?들이 ‘꼴페미’이기 때문인가? 정말로 소위 ‘페미니스트’들은 실제로는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역차별을 위해서 활동하며 ‘진짜’ 페미니스트들은 진정한 ‘양성평등’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여학생 휴게실 따위는 요구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진정으로 평등을 생각하는 건 이러한 ’꼴페미’들에 맞서는 ‘그들’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은 ‘구조’를 사고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무지에 다름 아니다. 이를테면, 대학 내에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위험이 존재한다. 신문을 펴 30분 정도만 읽어보자. 누구나 이 사회가 폭력적 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특히나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그렇다. 연일 보도되는 성폭력 사건은 몇몇 ‘싸이코패스’에 의한 범죄라기보다는 약자에 대한 폭력에 관대한 이 ‘사회’가 만들어낸 문제다. 이는 대학사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여성후배들은 아직도 ‘술 따르기’를 강요당하곤 한다. 노래와 춤을 요구받는 상황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또한 그녀들은 끊임없이 그녀들의 외모를 평가받아야 한다. 게다가 극단적인 성폭력의 위험 또한 존재한다. 여러분은 ‘친한 동기’들에 의해 저질러졌던 고려대 의대 성폭행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여성들은 사회적 편견을 이유로 ‘편안하게 쉴’ 장소를 허락받지 못한다. 예를 들면, 소위 ‘과방’ 혹은 ‘동방’에서 여성들이 편안한 자세로 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직도 존재한다. 게다가 휴게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때조차 그녀들은 ‘왜 조신하게 처신하지 못하느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한 시선들을 피해, 그녀들이 편안히 쉴 곳을 찾는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녀들은 남성들과는 다르게 생리라는 현상을 겪기도 한다.
그렇다고 나는 ‘남학생 휴게실이 필요없다’고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학교에는 절대적으로 휴게공간이 부족하며, 남학생들만을 위한 휴게공간 또한 필요하다. 다만 나는 ‘평등’이라는 가치가 ‘남학생 휴게실도 설치하자’는 주장에 갇힐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 여학생 휴게실은 있는데 남학생 휴게실은 없느냐” “이건 역차별이다” “진짜 페미니스트들은 이렇지 않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평등’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평등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자유기고가 박가분은 “마르크스를 읽지 않은 20대가 바보라 할 수 없지만, 40대를 넘어서도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읽지 않았다면 바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이야기했다. ‘자본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젊은 시절에 타인에 대해 가졌던 아름다운 연민의식이 소시민적인 자기연민으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남의 평등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에게 억압적인 이 가부장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평등을 위한다는 주장들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우리는 평등의 가치를, 남학생 휴게실에 가둘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