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영재 편집장 (ryuno7@skkuw.com)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던 어느 날, 필자에게 돈오(頓悟, 문득 깨달음)가 찾아왔다. “세상 모두가 나와 같을 수 없다”는 문장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은 나의 돈오에 대해 듣고는 곧바로 의아해하기 십상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우쳤냐는 의문이자 질책에 가까웠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어쨌든 고려시대 지눌 스님의 주장에 따르면, 돈오 다음에 점수(漸修, 점진적 수행)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다. 불교에서는 깨달음과 수행의 선후관계를 두고 논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상황에 국한시켜 본다면 ‘깨달음’은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실천하기에는 어려웠다. 많은 사람이 이와 비슷했다. 모두가 자신과 같지 않다는 명제를 알고서도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먼저, 지나치게 추상적인 이 깨달음을 원래 갖고 있던 개념과 결합시켰다. 모든 요소를 종합했을 때 개인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운(Luck)이다. 개인이 어떻게 생겼든 어떤 성격을 갖고 있든 어느 정도의 교육 수준을 갖고 있든,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책임을 따지자면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수십 년간 꼼꼼히 만들어지는 개인이라는 종속변수는 수많은 환경이라는 독립변수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마치 핸드드립 커피가 가게마다 미세한 맛의 차이를 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알고 나니 평소에 인격적인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며 대하기 싫어했던 사람들이 조금은 친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실로 돌아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례로 천인공노할 강력범죄가 그렇다. 대다수 사람들은 강력범죄를 접하면 범죄자를 모두 사형시켜버려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사실 범죄자의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은 범죄자가 사이코패스가 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드러난다. 일반인들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강력범죄를 접하니 당연히 이해하지 못한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현상을 접해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실질적인 지식이 아닌가 싶다.여기서 결론, 즉 본인의 개똥철학이 하나 도출된다. 타인과의 다름을 깨닫는 순간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갈등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돈오의 영역이다.
점수의 영역은 따로 있다. 인간 사회라면 필연적인 것이 갈등이다.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해나가야 사회가 견고히 유지됨과 동시에 진일보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주변을 바라보면 오래도록 갈등으로만 지속되는 사태가 종종 보인다. 서로의 다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이 진실을 감추고 있다고 비방하지만, 그런 경우의 대부분은 서로가 다른 진실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동반된다면 어쩌면 우리 주변의 갈등은 생각보다 쉽게 풀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