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탄생 100주년

기자명 나다영 기자 (gaga0822@skkuw.com)

“3월, 이 어두운 방에서-갑자기 낯설어진 한 도시의 소음을 들으며- 이 돌연한 잠 깨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모든 것이 내게는 낯설다.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다른 곳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세계는 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하는 알지 못할 풍경에 불과하다.”
-『작가 수첩Ⅰ』 232쪽-

▲ "반항인은 아니오와 예를 동시에 말할 수 있다."/ⓒMitmensch0812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일상생활과 습관에 대해서 ‘낯설게’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일상을 의심한 적 있는가?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손꼽히는 알베르 카뮈가 당신에게 말한다. 그 낯섦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망각하고 있는 세상의 부조리함이라고. 그리고 부조리함에 저항하는 ‘이방인(異防人)’이 되라고.
1913년 프랑스 알제리 소도시의 한 농가에서 카뮈가 태어났다. 1954년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나름 평온한 도시였다. 그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과 바다를 벗 삼아 자랐다. 성장기에 읽은 몽테를랑과 앙드레 말로의 작품들은 그에게 강렬한 자아실현의 의지를 불어넣었다. 카뮈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문제의식에도 관심이 있었다. 은사였던 장 그르니에 교수는 대학 시절 카뮈가 △니체 △쇼펜하우어 △파스칼 △키르케고르 등 철학자들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출 수 있게 도와주었다.
카뮈의 사상은 ‘부조리와 반항’, 그리고 때로는 실존주의로 이해된다. 정작 자신은 실존주의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사르트르 △보부아르 △메를로퐁티 등의 실존주의자들과 묶어 설명하곤 했다. 실존주의에서 존재는 실존(existence)과 본질(essence)을 합친 것이다. 실존은 몸뚱이다. 본질은 그 몸뚱이를 다른 그것과 구분해주는 개체만의 고유한 성질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몸뚱이가 본질보다 앞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미리 정해진 규범이나 본질이 없는 이상 인간은 무슨 행동이든 해도 좋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1941) 의 첫째 줄에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서 ‘죽음’에 대한 고찰은 현재 삶의 가치를 판단할 기회다. 일상이 주는 행복감을 맛보며 살아가는 몸뚱이에는 오직 현재만이 있다. 일상생활과 습관의 평온함 속에서, 남과 나를 구분해주는 본질에 대한 고찰은 이뤄지기 어렵다. 사형수가 돼 육체의 ‘죽음’ 이라는 문제를 생각한다면, 본질의 문제와 더불어 삶을 고찰할 기회가 온다. “죽음은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세계 내에 던져진 실존에는 존재 이유가 없지만, 그 이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끊이지 않는 질문이 바로 부조리의 감정이다. 그렇다면 삶 속에서 자각된 부조리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카뮈는 ‘반항’하라고 말한다. 반항이란 부조리를 깨어 있는 의식으로 바라보며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방인?(1941)에서 그는 반항의 정신을 보여준다. 반항인은 ‘아니오’와 ‘예’를 동시에 말할 수 있다. 자신을 속박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말하며,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에 대해서는 ‘예’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가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이렇듯 죽음에 대한 성찰은 『반항하는 인간』(1951)에서도 이어진다.
인간은 모두 ‘사형수’라고 말하는 『이방인』 속 죽음의 필연성은 결코 삶의 무의미함을 뜻하지 않는다.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기 살기 위해서 반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제시하는 객관적인 성공과 행복의 좌표를 따라 일상생활을 만들어가는 한국 사회에게 카뮈는 ‘죽음’을 권한다. 죽음으로써 무딘 습관에 ‘낯설어’지고, 타인과 구별되는 각자의 본질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결국, 비극적 결말의 『이방인』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삶의 긍정성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카뮈의 사상은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성찰의 거울이 되고 있다.
당신 삶의 낯선 자가 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