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추억의 한 조각을 베어내다
향수, 추억의 한 조각을 베어내다
  • 김태훈 기자
  • 승인 2013.04.01 23:53
  • 호수 1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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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퓸라이퍼 대표 이성민 조향사

향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마치 우리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양, 국내 퍼퓸샵의 선반은 언제나 해외 유명 향수들로만 가득하다. 그러나 외국에서 수입해온 ‘이야기’로만 가득 찬 선반 틈에서 자기만의 향기를 풀어내는 사람이 있다. 국내 최초로 자체 브랜드 향수를 제작하는 퍼퓨머리 ‘퍼퓸라이퍼’의 대표, 이성민 조향사를 만나 그의 향수에 담긴 그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떤 계기로 조향사가 됐나?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던 중 어렸을 때 향수를 좋아했던 일을 떠올리고 이제 조금만 더 늦으면 정말 평생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덜컥 30살에 회사를 나왔다. 그런데 막상 조향사가 되겠다고 돌아다녀 보니 일할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향수를 디자인하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주로 생필품이나 화장품에 향을 더하는 정도로 끝날 뿐 향수 완제품을 만드는 곳이 없었다. 조향사로 취업하기 위해 면접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당신은 꿈을 꾸고 있는 거다. 현실은 전혀 다르다. 그냥 광고대행사나 다니지 뭐하러 나왔느냐”는 말이었다. 그런 과정을 겪다 보니 오기가 생겼다. 그래, 니들이 나를 조향사로 안 만들어 주겠다 이거지? 그럼 내가 되고 만다. 이런 마음으로 나만의 퍼퓨머리(향수제작소)를 만들고 조향사 생활을 시작했다.

조향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사실 향수란 건 간단하다. 화학적인 레시피를 구해 향료 등 재료를 조합하기만 하면 된다. 음식을 만드는 것, 커피를 블렌딩하는 것과 같다. 이런 기본적인 화학을 공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향과 향이 서로 어울리는 ‘어코드’를 감성으로 풀어내는 것이 조향사의 일이다. 굳이 화학적인 지식이 풍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조향이란 마치 그림 그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꼭 물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물론 국내에 완제품 형식의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는 나뿐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것이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 수는 있다.

조향학을 전공하거나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공부했나?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조향학을 가르쳐준다는 학원에 가기도 하고, 향료의 구매처를 알기 위해서 향료회사에 무보수로 취직하여 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향수사업에는 표준이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자신만의 노하우로 진행해야 하는데 자신만의 노하우란 것은 결국 많이 해보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향수제작을 위한 기계를 구입하고 향료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없는 재료는 해외에서 주문을 했는데 가격이 엄청났기 때문에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면서 번 돈을 몽땅 쏟아 부었다. 이후에는 끊임없는 시도가 이어졌다. 향수를 만드는 일 외에도 처음 향수산업을 개척하다 보니 사업자로서 많은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미친 짓이었다. 만일 미리 알았더라면 이 일을 안 했을 것이다. (웃음)

향수에 처음 흥미를 느낀 건 언제였나?
내가 향수를 처음 좋아하게 된 시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첫사랑이자 지금의 아내를 만났던 즈음이다. 두 살 연상인 아내는 미술학원에서 편입시험을 준비했었고, 미대를 준비했던 나는 한눈에 반해 쫓아다녔다. 하루는 놀이동산에서 누나와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가는 길에 친구 집에 들렀는데 친구 누나가 쓰던 향수가 보였다. 그래서 데이트에서 잘 보이려는 마음에 온몸에 마구 뿌리고 나갔다. 그런데 그날, 집에 가는 길에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게 됐다.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향수 냄새 참 좋다’고 말해주던 그녀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다음날 친구 누나에게 찾아가 그 향수를 달라고 부탁했다. 눈이 퉁퉁 부어 부탁하는 나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는지 향수를 주더라. 이후 지금의 아내를 쫓아다니며 특별한 날마다 향수를 선물했다. 그렇게 향수를 계속 사다 보니 내 것도 사게 되고, 조금씩 좋아하게 됐다. 향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도 그즈음이다. 시간이 흘러 향수를 배우기 시작하고 첫 향수로 무엇을 출시할지 고민하던 중 첫 번째 향수인 만큼 첫 향수에 대한 기억을 그대로 담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가 데이트하던 맑은 날씨, 시원한 바람에 실려 오는 솜사탕의 냄새, 아이들의 웃음소리, 돌아가는 회전목마의 반짝이는 조명의 기억을 표현한 것이 내 첫 향수 메리고라운드다. 첫 향수다 보니 경제적인 것도 생각하지 않고, 몇 년동안 데이터를 수정해가며 온 마음을 담아 만들었다. 그 덕분인지 참 많이 팔린 향수이기도 하다. 다만 정말 좋은 재료들만 골라 사용해서 이익은 별로 남지 않았다.

▲ 퍼퓸라이퍼 향수들. 가장 위 쪽에 위치한 향수가 이성민 조향사의 첫 향수인 메리고라운드다. ⓒ이성민 조향사 블로그

영감을 주로 어디서 받나?
나는 일상 속에서 향을 떠올리곤 한다. 예를 들면 내가 만든 향수 중에 딸과의 추억이 담긴 ‘Star overhead’라는 향수가 있다. 어느날 저녁 양주 자택 뒷산에 딸의 손을 잡고 쫄래쫄래 올라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따라 하늘의 별이 총총하니 너무 예쁜 것이다. 그래서 5살배기 딸과 별을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딸이 문득 물어본 “내 별은 어떤 거야?”라는 말에 영감을 받았다. 어릴 적 우리는 모두 하늘에 자신의 별이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그 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별의 냄새를 표현하려고 고민해도 별의 냄새는 상상이 되지 않더라. 그래서 딸과 별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담기로 했다. 영감이 떠오를 때는 구체적인 향이 떠오른다. 그때부터는 라면 끓이는 것과 비슷하게 전개된다. 카레가루 좀 넣으면 이런 맛이 나겠지, 된장을 넣으면 이런 맛이 나겠지, 계란을 넣으면 좀 비릴 것 같아, 하는 식으로 조금씩 향료 비율을 조절해가며 생각했던 향을 만들어나간다.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웃음)

퍼퓸라이퍼가 지향하는 것은?
우리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독립적인 로컬 브랜드를 지향한다. 해외의 경우 퍼퓸하우스 하나에서 그 매장에서만 생산되는 향수가 있기도 하는 등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곳들이 많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곳을 꿈꾸는 친구들이 많으나 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그런 친구들이 더 많이 나와서 단순히 향수를 유통하는 것이 아닌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향수를 제작하는 곳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예컨대 홍대에서 자체적으로 옷을 제작해 파는 옷가게들처럼, ‘인디’ 퍼퓸샵들이 늘어나기를 기대해본다. 그런 것들이 생기다 보면 대형 퍼퓨머리도 자연스레 생겨날 것이다. 이 일을 하며 나름의 소명의식도 있다. 이렇게 인디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보면 소비자들의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며 자연스레 시장이 생겨날 것이고, 그렇다면 후배들은 조금 더 활동하기 쉽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따로 마케팅 전략이 있는지?
마케팅을 할 여력도 없고, 그냥 나의 향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한 분, 두 분씩 쌓아나가자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 잠깐 돈 벌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신념을 가지고 하는 일이기에 당장의 어려움은 있지만 이런 식으로도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고 본다. 굳이 마케팅이라고 생각한 것이 있다면 “스타벅스가 아니라 홍대의 유명 카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일 것이다. 홍대 그 카페 커피가 정말 맛있더라, 하는 정도의 평을 얻고 싶다.

앞으로 조향사로서, 사업가로서 계획은?
그냥 이 정도였으면 좋겠다. 사실은 애초에 이런 식으로 대대적인 브랜드를 만들어서 향수를 판매하려고 한 건 아니다. 그냥 외국의 향수도 소개하고, 내가 만든 향수도 판매하고, 손님이 오면 같이 커피나 한잔 마시고 담배도 피울 수 있는 그런 소소한 퍼퓸샵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런 곳을 만들고 유지하는 건 너무 어렵더라. 그래서 조금 더 자리를 잡으면 그런 샵을 만드는 것도 생각 중이다. 대단한 향수를 만들고자 하는 욕심도 없다. 향은 결국 찰나인 것이다. 사용하는 그 순간 기분이 좋으면 된 것이다. 단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런 향수가 있었는데 참 좋았지’ 하는 정도의 향수를 만들고 싶은 욕심 아닌 욕심이 있다. 사업에 욕심이 있기보다는 그냥 행복한 삶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 같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아서 하는 것도 좋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좋고, 잘 못해도 즐거울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도 좋다. 사실 그냥 돈 잘 버는 일도 좋다. 어떤 이유로 시작해도 좋다. 정답은 없지만, 지레 난 안 될 거야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남이 내 꿈을 만들어주기만을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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