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사이 전통예술의 혼을 불어넣다
나뭇결 사이 전통예술의 혼을 불어넣다
  • 조수민 기자
  • 승인 2013.06.04 02:08
  • 호수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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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완 서각가 인터뷰

우리나라의 수많은 절에 그의 서각 작품이 있다. 2007년 복원한 금강산 신계사도 그의 작품이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서각계에 뛰어들어 지금은 대한민국 현판 서각 분야의 1인자가 된 정지완 서각가의 이야기다. 치열한 자기 수련뿐 아니라 서각을 알리기 위한 대중화 사업에도 힘쓰고 있는 그를 충남 보령의 작업장에서 만났다.

조수민 기자(이하 조) 서각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시다면?
정지완 서각가(이하 정) 저는 초중고 학창시절에 서예와 미술을 배웠어요. 그리고 저의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서각을 하고 계셨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술 쪽에 관심이 많아 졌습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행정학을 전공하면서도 그 관심은 쭉 이어졌어요. 제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는 사회 운동이 많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며 저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민주 △자주 △통일을 주제로 한 서각 개인전까지 열게 됐죠. 당시 얼마나 서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냐면, 그때 제가 우리나라에서 서각 개인전을 연 게 8번째였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이 서각에 호기심을 더 많이 가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서각으로 저의 사회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선택하게 됐습니다.

조: 선생님이 처음 시작하실 때는 서각이 비인기 예술로 여겨졌는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으셨는지.
정: 일을 하면 수익이 발생하는 경제활동이 돼야 하는데, 서각을 시작한 초반에는 그러질 못했어요.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제 작품을 사주는 사람도 없었거든요. 종종 노동조합이나 민주 단체 쪽에서 현판 제작을 주문하기도 했지만, 경제활동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어요. 그러던 중에 1999년부터 중앙승가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어요. 1년에 30~40여명의 스님들이 저에게 서각을 배우시고, 전국 각지의 사찰로 퍼졌죠. 그러다 보니 전국 사찰의 일거리가 다 저에게 오는 거에요. 그러면서 점점 수익이 발생하기 시작했죠.

조: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에 선생님의 작품이 걸려 있는데, 얼마나 많은 작품을 제작하셨나요.
정: 사찰 수로만 따지면 총 300군데 정도입니다. 보통 한 건물을 하면 현판 하나에 기둥의 주련* 4개 정도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건물 하나당 다섯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렇게 300곳의 사찰을 했으니대략 계산해 보면 천 오백 점 정도가 되고, 한 사찰에 건물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몇 채씩 있으니 개수로만 따지면 엄청나죠. 그때는 나이도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었고 일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힘든지 모르고 했던 것 같아요. 가끔 힘들 때는 나중에 할아버지가 돼서 절에 갔을 때 손주에게 이야기해주는 상상도 해보며 열심히 했었습니다.

▲ 정지완 서각가가 작업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조수민 기자

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으시다면 어떤 작품인가요?
정: 금강산 신계사입니다. 금강산 신계사는 신라 시대의 사찰로 6·25때 소실됐었어요. 그러다가 2004년에 남과 북이 통일 불사를 염원하며 신계사를 복원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제가 신계사의 현판부터 주련까지 모든 작업을 도맡아 제작했습니다. 신계사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된 게, 바로 고 성철스님의 생가인 겁외사 복원 작업이었습니다. 누구나 하고 싶어 하던 당대 최고 큰 스님의 생가 복원 작업을 제가 하다 보니, 불교계에서 중요한 현판 작업이 필요한 경우에 저한테 먼저 연락이 옵니다. 그래서 금강산 신계사 일도 “이건 정지완이 해야만 책임지고 완벽히 할 수 있다”고 하시며 연결이 된 거죠. 비록 분단됐지만, 남한과 북한의 불교계가 힘을 합쳐 민족적 차원에서 진행한 복원 작업에 제가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 의미 있는 일이었고 행복했습니다.

조: 지속해서 민족의식과 관련된 사업을 해오고 계시는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시다면?
정: 저는 서각으로 경제활동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민족적인 일에 관여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독립운동관에 제 작품이 소장돼 있고 이 외에도 △상해 임시정부 △양재동 매헌기념관의 현판 △필라델피아 서재필기념관 제 작품이 있습니다. 앞으로 2014년 광복 70주년 행사도 크게 기획할 예정이에요. 우리가 나라를 잃었을 당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정말 열악한 상황이었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땅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운동을 이어나가셨죠. 하지만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떨까요? 이젠 전보다 풍족한데도 그런 정신을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을 계승해 요즘 사람들에게도 좋은 글귀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또 유명하신 분들 외에도 소리소문없이, 붓글씨나 어록조차 남기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을 직접 찾아내고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왜곡 없이 정확한 검증을 거치기 위해 자료를 독립운동연구소에 보낸 후 최종적으로 허락을 맡고, 작품을 제작했죠. 
물론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하는 것이 돈도 안 되고 너무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은, 선배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존재하니까 우리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거고. 그래서 그런 분들의 이야기, 사상 등을 서각으로 재창작해 보급하려고 하는 거죠.

조: 서각의 대중화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는데,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정: 1994년도에 서울에서 결혼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이사를 여섯 번이나 다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저는 가는 곳마다 단체를 만들었어요. 사람이 몇 명이라도 모이면 무조건 조직화를 하는 거에요. 그렇게 제 작업장이 동아리 공간이 되고 사랑방이 됐어요. 그러다가 1999년도부터 중앙승가대학교 강의를 시작하고, 수입이 늘어나면서 그 수입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대중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고향인 보령으로 다시 내려와 ‘보령서각체험학교’를 세웠습니다. 많은 분이 체험학교를 거쳐 서각을 배워갔습니다. 또 한국서각협회의 충남지회 초창기에 활동하면서 충남 지역을 조직화시켰습니다. 1996년도부터 사무총장을 4번 맡으면서 큰 국제전을 꾸려내는 일 등을 진행했죠. 그러다가 올해 초 한국서각진흥협회라는 법인을 새롭게 설립했습니다. 이미 여섯 개 정도가 있는 서각 사단 법인 중 가장 후발주자인데요. 전시나 홍보뿐 아니라 서각 문화재에 대한 조사 연구 사업에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서각 문화유산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 보수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훑어보는 거죠.

조: 일본과 중국도 서각이 있잖아요. 그들과 우리 서각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정: 우리 서각과 일본 서각이 차이가 나는 것은 문화 정서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붓글씨를 쓴 원작자의 의도를 중요시합니다. 일본에서는 서각을 ‘각자’라고 하는데요. 일본은 서예를 각자를 하기 위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서예를 그대로 복사해 서고를 만들어 서각을 하는 우리와는 달리 일본은 붓글씨를 그대로 뜨지 않습니다. 붓글씨 위해 기름종이를 올려 다시 조작해내죠. 각자를 하기 위한 글씨를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원본의 미세한 부분이 잘 살아나지 못하겠죠. 그러니 우리와 같은 창칼을 쓸 필요도 없어지는 겁니다.
사실 칼을 사용하면 더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본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본 정신은 각자를 하기 위한 서예라서, 칼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전통 방식이 끌 기법이니까요. 끌 위에서 망치로 두들기며 쳐 내려가는 일관된 방식으로는 다양한 작품이 나오기 힘들죠. 반면에 우리는 칼을 이용해 보다 더 자유로운 곡선 표현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 서각이 풍부한 겁니다. 중국은 예전에는 우리와 같이 창칼기법이었는데, 근대에 와서는 끌 기법을 씁니다. 일본이 자신들의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수교 직후 서각을 가르쳐준다며 중국에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방법을 보급했기 때문이죠. 

조: 선생님이 최종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시다면 어떤 건가요.
정: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겁니다. 또 이뿐 아니라 서각의 교육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교육장이라고 하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말하는데, 이곳에서 감상만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교육의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로 서각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제 꿈입니다. 교육의 기능, 문화 사랑방의 구실을 해 서각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주련(柱聯)=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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