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나다영 기자 (gaga0822@naver.com)

▲ 지난 25일 슬라보예 지젝이 강남 플라툰 쿤스트할레에서 강연 중이다. 이영준 기자 spiritful45@
<연재 순서>
① 위기의 서울에서 만난 위험한 철학자
② 자본주의와 무위의 공동체

2013 가을, 소비의 도시 서울에서 ‘멈춰서 생각하라’는 주제로 세계의 철학자들이 모였다. 이에 본지는 연재기획으로 그들의 논의를 2회에 걸쳐 담을 예정이다. 첫 번째 연재에서는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상을 다룬다.

“여러분은 박수를 치라면 아주 잘 치시네요”
3000명이 넘는 청중의 박수세례를 받으며 시작한 첫 번째 강의에서 그가 건넨 위트 있는 인사다. 슬라보예 지젝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이번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한국에 ‘멈춰서 생각하라’고 말해주기 위해 왔다고 한다. 그는 24일부터 개최된 3일간의 강연에서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부터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유까지 공유하며, ‘위기의 사회’를 사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말해주었다. 진지한 철학 강의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매회 강연마다 대학생들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구성원들의 참여는 한국에서 지젝의 이례적인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글로벌 자본주의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한국은 극단적 개인화와 동시에 공동의 정신으로 연결된 특이한 사회다. 공동 정신을 이루는 디지털 문화 때문에 한국인들은 감정의 사막화를 겪고 있는 듯하다.” 첫째 날 지젝은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언급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한국 국민들은 식민시대, 6·25전쟁,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오히려 신체적 억압에서는 자유로워졌으나 정서적 통제에는 무뎌졌다. 그래서 어느 문화권보다 저항 없이 디지털 문명을 수용했고, 동시에 삶의 리듬은 디지털화됐다. 그는 경쟁과 소외, 고립의 환경에서 부는 한국의 힐링 열풍이 ‘감정의 사막화’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젝은 이러한 현상 뒤에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채택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실질적인 이데올로기가 없다”고 비판한다. 동서양과 종교를 막론하고 어디든 적용되는 자본주의의 논리는 기존 체제의 사회·경제 질서를 흐릿하게 만든다. 여기서 그는 강연의 주제인 헤겔의 ‘0적 동물의 왕국’을 접목한다. 이는 개인 자신에 대한 확신과 목적 성취만을 가지고, 자신의 기쁨만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결과를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는 자기 자신으로, 즉 ‘0’으로 수렴한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이기주의를 추구하면 할수록 공동선이 완성되는 모순적인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과도한 자기 개발을 하며 경쟁하는 동물의 왕국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자본주의자들을 쾌락주의나 공리주의와 같은 논리에 적용시키도 힘들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의 쾌락을 희생하면서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쾌락주의자가 아니다. 환경을 파괴하는 자본가라도 장기적으로 피해가 그들에게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기도 힘들다. 지젝은 “자본가들의 이 변태적인 헌신을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을 이기주의자로 만든 ‘0적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했다.

현대인은 쾌락조차 강요당한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찰은 셋째 날 강연에서 심층적으로 논의됐다. 지젝은 “오늘날의 소비주의자들은 계산된 쾌락주의자다. 우리는 쾌락조차 강요받고 있다.”고 비판하며, 현대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을 설명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쾌락을 ‘단순한 쾌락’과 ‘과도한 쾌락’으로 분류했다. 전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쾌락을 신중히 계산하는 반면 후자는 존재의 절정에 도달하려 한다. 현대의 소비양상은 ‘단순한 쾌락’을 추구한다. 우리는 쾌락을 즐길 수 있지만, 너무 과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콜라를 마시지만, 제로 콜라를 마셔야하고, 초콜릿을 좋아하지만, 그것은 저지방 초콜릿이어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가 그렇다. 쾌락들이 건강을 위한 과학 지식의 규제를 받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강렬한 쾌감이 아니라 단지 쾌감의 외관만을 얻는다. 지젝은 “가장 강렬한 즐거움의 형태는 자발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사적인 쾌감까지 학습하며 통제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다. ‘단순한 쾌락’ 때문에 우리는 갤럭시  시리즈와 같은 인공 지능물에 의존한다. 그는 “과학기술이 우리의 쾌락을 대체하고, 전지전능해질수록 우리는 무기력해진다”며,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진정한 문제를 질문하기 위해 철학자가 되라
그렇다면 이렇게 실질적 이데올로기가 없는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청중석에서 한 대학생이 철학이 현재 자신의 인생에 어떤 해결책을 줄 수 있는지 질문했다. 지젝이 답했다. “문제에 대한 해결력을 키우기보다는 문제 자체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지성인이 되세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사회’는 금융위기나 제도적 규제를 해결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진정한 문제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문제에 대한 해결책만을 고민한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 사고들은 우리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 자체를 던지고, 고민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삼일 간의 지젝 강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