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형 편집장 (xogud246@skkuw.com)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말이다. 국가적인 애도 분위기 속에서 합동분향소에는 연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각계각층에서의 성금도 모이고 있다. 언론은 이러한 슬픔을 다양한 형태로 나르고 있다.
대학가 역시 추모 분위기가 한창이다. 우리 학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학에서 5월 대동제 행사를 취소·연기했고 여러 가지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노란 리본’은 추모의 상징이 돼 교내 곳곳에 걸려있다.
필자는 세월호 발생 이후 드러나는 어처구니없는 사실과 이로 인한 희생자들을 보며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상실감을 느꼈다. 새벽까지 텔레비전으로나마 구조 상황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때 느꼈던 것은 분명 슬픔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나는 무감각해졌고 일상의 삶을 살게 됐다. 여전히 세월호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에서 느끼는 감정은 슬픔보다는 분노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고 필자는 그것이 강요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의 지인 역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의 ‘노란 리본’ 물결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은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페이스북에 자신의 즐거운 일상생활을 올리는 것도 눈치 보인다고. 집단의 슬픔이 타인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적절한 애도 과정에 대한 본인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는 비극을 대하는 자세를 두고 집단 내에서 묘한 긴장을 만들기 마련이다. 긴장은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하며 공동체에 악영향을 준다. 이것을 유족들은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고 또 하나의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유족들의 슬픔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구조작업이 마무리되고 장례식을 치른 후 세월호 사건은 서서히 사람들에게서 잊힐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로 돌아온 유족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에서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느껴야 한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빨래할 때도. 매 순간 느껴지는 슬픔은 어느 때보다 무겁고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슬픔을 딛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낼 것이다. 미국의 소설가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는 저서 『슬픔의 위안』에서 사람들은 정의를 통해 슬픔을 승화한다고 말하고 있다. “비극을 책임져야 할 개인이나 체제에 맞서 정의를 요구하는 개혁운동가”가 세월호 유족들 사이에서도 나올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처는 잠시 덮어둔 채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부조리를 바꾸려 한다.
이번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의 갖가지 부조리를 드러내고 있다. 승객을 내팽개친 선장, 선박을 불법 개조한 해운 업체, 무능력한 구조 당국과 정부. 한둘이 아니다. 언론에서는 매일 새로운 문제를 비판하고 사람들은 분노한다. 이것이 문제 해결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후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유족들이 이에 대해 목소리 낼 때가 진정으로 집단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이제 세월호 사건으로 슬픔에 잠기거나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유족들의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에 동참하고 싶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만드는 것은 이제부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