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촌사람들 - 은하 세탁소 양영길씨

기자명 윤나영 기자 (nayoung4798@skkuw.com)

▲ 윤나영 기자 nayoung4798@skkuw.com

자과캠 쪽문을 나와 천천히 걷다 보면 유난히 낡고 투박한 녹색 간판이 보인다. ‘은하 세탁’이라고 적힌 간판 아래를 슬쩍 들여다보면 세 평 남짓한 공간에 서서 힘껏 다리미질을 하고 계시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바로 우리 학교 학우들의 단정한 옷차림을 책임지고 계신 은하 세탁소 양영길(63) 할아버지다. 28년간 변함없이 세탁소와 함께한 그의 인생에 귀 기울여 봤다.
은하 세탁소는 1987년 처음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셋째 딸 은하의 이름을 따 은하 세탁소가 됐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본에 수출할 옷을 만드는 일을 했다. 한 때 30여 명의 직원을 이끌며 꽤 넉넉한 생활을 했지만 일본 경기가 악화돼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봉제공장에서 재단과 다리미질을 하던 경험으로 지금의 은하 세탁소를 열게 됐다. 할아버지는 현재 세탁업 협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는 자타공인 세탁 전문가지만, 그 역시 초보 세탁사 시절엔 셀 수 없이 많은 옷을 변상해줬다. “초보 딱지를 떼기 위해 정말 독하게 공부했어. 옷감에 따라 쓰이는 화학 세제들이 모두 조금씩 다르더라고.” 그런 할아버지의 노력 때문인지 멀리 이사 간 사람들도 계절이 바뀔 때면 한 보따리씩 세탁물을 맡기고 간다. “그런 손님들에겐 항상 고마워.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그런 사람들이 백 명 정도 있어.”
28년간 늘 같은 자리에 있어서일까. 은하세탁소는 무척 다양한 학우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할아버지는 자취생들이 세탁물을 맡기러 올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했다. “집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로 세탁을 맡기고는 돈이 모자라 찾아가지 못하는 애들이 종종 있어.” 20만 원의 생활비로 한 달을 살아야 한다는 학생을 보며 세탁비를 깎아준 적도 많다. 밥도 잘 챙겨 먹지 못하는 학생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어 냉장고에 있는 김치를 나눠주기도 했다.
세탁소 특성상 할아버지는 우리 학교 운동부 선수들과 특히나 교류가 많다. 매 훈련이 끝나면 땀과 흙으로 범벅된 운동복을 세탁하러 오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체격이 큰 선수들은 키가 작은 할아버지를 놀리며 장난을 치곤 했다. “운동부 애들은 신입생한테 세탁 심부름을 전부 시키는데,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모창민도 1년 가까이 선배들 심부름한다고 고생 많았지.” 아직까지 모창민 선수는 전화로 할아버지께 안부를 묻곤 한다.
세탁소 문을 닫는 날이면 그는 △농구 △볼링 △축구를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 된다. 아들보다 볼링을 잘 친다며 자랑스러워하는 그의 차엔 항상 볼링공이 함께한다. “학생들과 많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젊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세탁소 수입이 많진 않지만 지금의 삶이 정말 만족스러워.” 이런 그가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역시 자신의 기술로 손님을 대만족 시켰을 때다. “아무 데서도 못 고친 옷을 내가 고치니 감쪽같다고 말하는 손님을 보면 정말 행복해. 사실 내가 손재주가 좀 있지. (웃음)” 할아버지는 늘 적당량의 세탁물만 받고 그 이상의 것들은 돌려보낸다.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주어진 일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아침 일찍 세탁소 문을 열러 올 때면,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학생들과 종종 마주친다. 그럴 때면 그는 학생들이 너무 목표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단 생각에 크게 꾸짖기도 한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실 부모님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성균관대엔 훌륭한 학생들도 많지만 대학 4년 과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학생들도 많은 것 같아. 지금이 사회에서 생활하기 위한 준비단계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어.”
늘 같은 자리에서 성장하는 학생들을 지켜보고 때로는 따끔한 채찍질도 아끼지 않는 은하 세탁소 양 할아버지. 그는 우리에게 든든한 아버지 같은 존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