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성대신문에는 총 5개의 부서가 있다. 어느 부서의 높고 낮음 없이 △문화부 △보도부 △사진부 △사회부 △학술부는 모두 힘을 합쳐 성대신문을 만들어간다. 하지만 부서마다 독특한 개성을 유지하고 있어 각자가 그리는 이상적 모습이, 겪고 있는 고충이 모두 다르다. 평소엔 알 수 없었던 그들의 속내를 한 번 들여다보자.

보도부,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
금요일 밤, 보도부 기자들은 막차시간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매주 월요일 오후 6시, 양 캠 중앙운영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도부 기자들의 한 주는 시작된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자과캠도 이제는 헤매지 않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학교, 그리고 학내 모든 사안을 꿰뚫어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축제나 전체학생대표자회의, 등록금심의위원회 등과 같이 그 자체로 기사화 할 수 있는 사안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취재해 학우들에게 내보이고 싶은 더 중요한 것은, 흩어져 있어 한 눈에 볼 수 없었던 조각들을 모아 그것이 타당한지를 가리는 기사이기 때문에 머리와 발을 쉬게 할 새가 없다.
숨 막히는 화요일 편집회의를 치른 뒤 수요일 아침을 맞았다. 이때부터 금요일 오후까지의 수업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취재시간이 될 잠재성을 가진다. 600주년기념관을 들락거리며 학교 관계자를 찾아뵙기도 하고, 양 캠 총학생회장과는 엄마보다도 통화를 더 자주 한다.
사안에 따라 타 대학 직원, 총학, 학우들과도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더 꼼꼼하고 치밀한 기사를 쓰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묻고 따지고 부탁하기 시작한 지는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수업 듣는 내내 교수님 얼굴에 오늘 마감해야 할 기사가 아른거려서 죄송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닌 걸.
취재에 치여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평일을 보내고 기사를 쓰기 위해 키보드 앞에 앉았다.
어떻게 써야 객관적이면서도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을지. 내가 쓴 문구 한 줄이 당사자들과 독자들에게 어떤 파장을 미칠지 너무 잘 알기에 완고 직전까지 고뇌를 멈출 수 없다.
무엇을 써야할지, 무엇이 진실인지 매번 알기 힘들다. 그렇기에 더 열심히 취재해야 한다. 최대한 많은 것을 조사한 뒤 진위를 판가름하고 비판을 가하는 것. 보도부 기자는 오늘도 ‘기사로 말하기 위해’ 첫차를 타고 집에 돌아간다.
- 성대신문 보도부

문화부, "우리가 만들면, 그게 문화입니다"
“모두가 잠깐 느꼈던 것을 조금 더 길게 느끼고, 스쳐 갈 수 있게 종이로 남겨두고 잡아두고 싶었어요.”
한 소설가가 일간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문화부 기자 역시 이 말에 수백 번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와 감성을 나누고 싶은 근질거림, 문화부 기자가 되고자 하는 가장 큰 동기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무한대로 발산하는 문화 중에서 하나에 정을 주기란, 타인에게 그것의 가치를 어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의 폭에서 내가 고른 어떤 것에 대한 책임, 애정을 준 만큼 감당해야 할 숙제 같은 것이리라.
틀에 박히지 않은 심층적 ‘문화기획’, 기자의 개성을 살린 ‘감성스케치’, ‘액자 속의 예술’, 라임을 살린 헤드와 감각적인 레이아웃 등. 단언컨대 문화면은 성대신문의 ‘오아시스’다. 그러나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는, 딱 그 정도의 수분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지면에 말랑말랑하면서도 연약하지 않은, ‘감성이 가미된 이성’을 꾹꾹 눌러 담는 일. 바로 문화부 기자의 필연적 과제다. 그런데 문화부 기자로서 누릴 수 있는 보람은 그렇게 해서 나온 필터링 된 문장들보다, 취재원의 생생한 ‘눈빛’과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정제된 기사보다, 숨소리, 기침 소리, 인터뷰하며 당황해 떨리는 기자의 목소리까지 담겨 있는 녹음 파일은 어느새 차곡차곡 쌓인 소중한 자산이 됐다.
문화부 기자란 말 앞에 ‘성대신문’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대학생과의 연관성, 우리 학교가 위치한 대학로·종로 일대와 수원시 주변의 문화…. 우린 늘 고뇌한다. 이번 60주년 기념호에서는 학우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우리 학교 주변의 문화를 담아보기로 했다. 종로구 창신동을 살리는 ‘000간’의 공공예술 프로젝트, 비주류 문화를 담는 통인동의 이색 전시 공간 ‘시청각’, 그리고 참신한 발상의 대중적 전시 ‘트로이카 전’까지.
만 팔천 명의 학우가 만 팔천 명 나름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대학 문화의 현주소. 그 속에 사라진 ‘공감’을 되찾고 싶다. 문화부에서는 더 이상 ‘문화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문화를 어떤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문화는 수학도, 과학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화인가.’ 우리가 만들면, 그게 바로 ‘문화’다.
- 성대신문 문화부

사회부, “독자들과 함께하는 사회부이고 싶습니다”
성대신문 사회면. 참 천덕꾸러기 같은 부서일지도 모르겠다. 성대신문이 여태껏 맞닥뜨렸던 위기들에 사회면이 빠지는 법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한편으론 부서가 갖는 의미를 설명하기 가장 까다롭다.
편집회의를 준비할 때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일들 중에 어떤 것을 기획기사로 준비해야하나 고민이 시작된다.
뉴스가치가 있는 소재는 넘치기 때문이다. 다행히 독자에게 가장 중요한 소재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기획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대신문 사회부가 늘 고민하는 것은 성균관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우들이다.
다른 신문도 아닌 ‘성균관대 유일의 정론지’라는 관점에서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독자는 대학에 다닌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대학에서의 의사결정에 있어 거의 대부분의 우리나라 대학은 학생의 참여가 제도화 돼있지 않기에 소외된다. 그래서 더욱이 성대신문은 대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또 하나는 지역에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캠퍼스 근처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지역과 학우들 간의 직·간접적인 상호작용은 무시할 수가 없다. 또한 많은 학우들이 학교 주변 혹은 기숙사에 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성대신문은 지역의제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아직 기성사회에 진입 직전인 청년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청년으로 사는 것은 대체로 고달프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배재돼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기에 성대신문은 이들의 작은 목소리를 대신 전해야 한다.
성대신문 기자로서 주목해야할 대학, 지역, 청년의제 속에서 노동, 여성 등의 구조적인 사회의제를 녹이는 것. 그 것이 바로 성대신문에 사회면이, 사회면을 책임질 사회부기자가 필요한 이유다. 부서의 슬로건처럼, 우리는 늘 독자님들과 함께하고 싶다.
- 성대신문 사회부

학술부,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찾기 위해 존재합니다"
“학술부 기사는 재미없어서 읽기 싫어.”
학술부 기자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쉽게 쓴 글엔 심화된 내용이 없다는 비판이, 전문적인 글엔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비수가 돼 가슴에 꽂히고 만다. 도대체 내 기사의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고민하길 수백 번. 학술부의 존폐 위기 속에서 학술부 기사에 여전히 자부심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학술부는 타 부서가 지니지 못한 ‘학문의 가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관심의 촉이 술, 연애, 취업에 향해있는 요즘 대학생들은 학문을 위한 학문에는 관심이 없어진지 오래다. 젊은 세대에게 학문이란 죽어버린지 오래인 고리타분한 단어가 돼버렸다. 나 역시 학술부 기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사실 학문의 영역은 항상 생동해있었다는 것을. 눈에 띄진 않지만 조금씩 나의 세상에 스며들고 있었음을.
학문에 몰두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내는 그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인간적 사랑, 존경, 믿음을 느낄 수 있다.
학술부는 그 강직함의 가치를, 그런 노력의 아름다움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수학과 타 학문을 연결하자는 Bridge Seoul Conference, 위험사회로부터 해방적 파국을 말하는 울리히 벡. 학부생으로서 이번 호의 취재 과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었다.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책상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앉아있는 우리들의 모습, 전문가를 인터뷰하면서 수준 높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 악물고 공부하는 우리들의 모습…. 끝이 보이지 않는 학술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우린 어떤 것이 과연 가장 가치 있는 것일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 성대신문 학술부

사진부,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부는 그렇게 존재했다”
‘순간의 역사,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일전에 퓰리처상 사진전을 찾았을 때, 가장 인상에 남았던 문구다. 과거의 시간은 흘러가버렸지만, 사진은 그대로 남아 그 시간과 의미를 기록한다. 사진이 다른 그 어떤 매체보다 매력적인 이유다.
학생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우리는 보도사진과 감성사진, 인물사진 등 다양한 종류의 사진을 찍어왔다. 구도도, 찍는 환경도 모두 다르지만 공통적인 단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한 장으로 말할 수 있는 사진’을 찍어야한다는 것이다.
사진부가 한 주에 10곳이 넘는 곳을 다니고, 1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나며, 1000장 가까이 사진을 찍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사실 구도적으로 잘 찍은 사진은 몇 장만 찍으면 건질 수 있지만 그 상황이나 인물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사진을 찍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진부를 단순히 ‘신문에 실릴 사진을 찍는’ 부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진부는 ‘사진으로 말하며, 의미 있는 사진을 위해 항상 고민해야 하는’ 부서다.
모든 사진 기획이 그렇듯, ‘성대신문이 다시 만난 20명의 사람들’ 60주년 시각면도 같은 질문에서 시작됐다. 60주년을 맞은 성대신문에는 어떤 사진을 실어야 의미 있을까. 세 명의 기자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떠오른 것은, 성대신문에서 만난 취재원들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20명 취재원의 얼굴을 담기로 한 후, 취재원 선정부터 취재까지의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부서 동행 취재까지 더해져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한 주였다. 메모장은 빽빽한 취재 스케줄로 가득 찼으며, 취재를 5곳이나 다닌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기획이 우리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정형화된 기존의 인터뷰 사진에서 벗어나 각기 다른 스무 명의 표정을 투박하게 담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단 한 장으로 취재원의 진솔한 모습을 담아내고, 독자에게는 ‘이 사람이 누굴까’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을 찍고 싶었다. ‘사진 찍을게요!’ 카메라를 보며 쑥스러운 듯 웃는 그 표정이 좋았다. 구도가 깔끔하지 않아도, 표정이 자연스럽지 않아도 괜찮다. 투박한 20명의 사진 하나하나를 위해 이번 주도 사진부는 그렇게 존재했다.
- 성대신문 사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