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소 - 송락규 (국문 09)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지난 달 19일 한국갤럽 여론조사결과 ‘세월호특별법 재협상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46%로 다시 협상해야 한다는 응답보다 5% 포인트 앞섰다. 이러한 결과는 지난 달 17일 일부 세월호 유족들이 연루된 대리기사 폭행 사건의 여파인 듯하다.
다수결은 숫자놀음이다. 복잡한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주는 만능열쇠다.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자 일부 언론들은 ‘아픔을 딛고 일어서자’, ‘세월호 블랙홀’이란 표현을 서슴없이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야의 협상으로 세월호특별법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그 과정에서 유족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냈지만 여론과 미디어에 의해 주목받지 못했다. 이렇게 아픔은 숫자에 의해 압도된다.
숫자에 압도되어 진실이 가려진 경우는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득세다. 나치즘의 확산엔 중산층의 지지가 큰 영향을 줬다. 나치는 조직적으로 선전·선동에 열을 올렸고,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민족이라 평가받던 독일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치에 열광했다. 그 결과 독일인들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되었다. 전쟁의 참상, 유대인 학살 등을 통해 게르만족의 명예는 한없이 추락했다.
다수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책임 회피다.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총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근거는 간단했다. 자신은 상부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상부’는 국민 대다수의 지지에 의해 만들어졌다. 사회 전반에 독버섯처럼 퍼져있던 다수의 논리가 평범한 이를 얼마나 악하게 만들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 사례였다.
다수결은 항상 공동선을 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결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수결에 경도되고 때로는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라 여긴다. 민주주의는 뜻풀이 그대로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자 원칙인 정치체제이다. 여기에서 국민은 다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가리킨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불가피한 수단일 뿐 핵심이 될 수 없다.
마틴 루터 킹은 격렬했던 흑인운동 시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의 비극은 약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다.” 50년도 지난 킹 목사의 말이 지금도 우리 사회에 적용될 수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