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조희준 기자 (choking777@skkuw.com)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책 '서울대의 나라'를 시작으로 고질적인 학벌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됐다. 이후 2000년대 들어오면서 정부 주도로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학벌주의를 드러내고, 시민사회운동단체 역시 고등교육에 대한 다양한 개혁안을 내 놓는다. 하지만 너무 늦었던 걸까? 그때보다 대학서열은 더욱 공고해진 것인지 기성언론에서는 각 학교의 익명 커뮤니티에 ‘골품제’, ‘학내 카스트’ 등의 게시물이 올라오는 현상을 보도하고 있다.
지난 7월, 연세대 독립언론 ‘연세통’은 연세대의 인터넷 커뮤니티 ‘세연넷’의 익명 게시글을 토대로 연세대의 학내 카스트 문제를 다뤘다. 학내 카스트는 입학전형이나 소속 캠퍼스에 따라 차별의식이 생기고, 학과 간 서열경쟁이 있다는 것이다. SNS에서 나오는 반응은 다양했다. 일부 댓글에는 ‘학내 카스트 문제를 반성하자’는 공감도 담겼지만, 익명 커뮤니티의 사례를 일반화했다는 것에 대한 지적과 ‘요즘 20대’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기성언론이 본 20대, “문제아”
연세통의 보도 이전부터 서울대에 지역균형선발로 선발된 학생들이 ‘지균충’으로 호명되고 소외당하는 등의 문제는 기성언론에서 익히 다뤄진 바 있다. 훨씬 이전부터 이러한 현상은 존재했지만, 최근에 언론은 과거보다 자주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한국언론재단이 구축한 기사 DB 서비스 ‘미디어가온’에 ‘지균충’이 포함된 전국종합일간지를 검색하면, ‘지균충’은 2013년 10월에 처음 등장했고 마지막 기사가 나온 올해 10월 2일까지 총14건의 관련 기사가 나온다.
기성언론에서 학내 카스트 문제를 보도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현 대학생 세대에게만 문제를 한정한다는 것이다. 20대가 만드는 매체 ‘고함20’의 김선기 씨는 “학내 카스트 현상은 대학 안팎을 이해한 상태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며 “기성언론의 보도는 20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김 씨는 이와 같은 보도가 나오는 것에 대해 김씨는 청년세대 정치화의 실패에서 나온 실망의 표출로 보고 있다. 과거에도 학벌주의에 의한 차별이 존재했는데 지금의 20대의 인성을 문제 삼는 것은 이를 오롯이 20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는 “청년이나 대학생이 학벌주의를 타파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좋겠지만, 청년만 바뀐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며 “이미 권력을 쥔 ‘486세대’ 역시 바꾸려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말 우리 잘못일까
현재 대학 내에 입학전형 및 학과별로 위계질서가 정립되는 ‘학력위계주의’가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인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오찬호 연구원은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학력위계주의 문제는 그 추이를 지켜볼 때 유의미한 특성”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처음에 서울대에서 지역균형선발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지균충’으로 호명하는 것은 극히 일부의 사례였다. 하지만 서울대 외에도 각 대학의 인터넷 커뮤니티와 페이스북 대나무숲 및 대신전해드립니다 페이지 등에서 제2캠퍼스 대학을 낮춰보는 등 비슷한 양상의 차별이 나타나고 있다.
학력위계주의는 현 20대가 자기계발 담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기인했다. 자기계발 담론의 골자는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것이다. IMF 이후 청년실업이 심화돼 경쟁이 치열해졌다. 동시에 현 20대들의 부모인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를 앞뒀지만, 지출을 줄일 수 없기 때문에 20대들의 취업이 시급해졌다. 환경적인 이유에 의해 자기계발 담론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교육이 현 사회의 학벌주의 문제를 지적하지 못해 현 세대가 고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요인도 간과할 수 없다. 사회문제를 성찰할 수 있도록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 줘야할 교육이 사회의 부작용을 환기하지 못했고, 오히려 취업만을 위한 교육으로 자기계발 담론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대학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평가가 취업률 및 재정 위주의 지표에 따라 수행돼 인문학이나 사회학 같이 사회를 성찰하는 학문이 계속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인문학이 사라지는 한편, 취업난에 시달리는 대학생은 경영학을 배우는 게 필수가 돼버렸다. 오 연구원은 “경영학에서는 주로 기업의 성공과 그 요인은 배울 수 있지만, 부작용은 가르치지 못 한다”며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편협한 시각이 생겨 자기계발 담론을 강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경제와 교육 등 기성세대가 만든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부 20대들 사이에서는 학벌주의가 학력위계주의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오 연구원은 “역으로 다시 문제를 낳은 구조로 돌아가 자기계발 담론을 비롯해 대학 구조조정 등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성찰해야한다”고 했다.

 
 대학서열의 기원
한편, 이러한 학력위계주의 현상은 사실 기존의 학벌주의가 노골화된 결과다. 학벌주의는 출신학교의 배경에 따라 개인의 사회적 위상이 결정되는 가치 및 이념체계로, 같은 단계의 학교를 졸업했더라도 대학서열에 따라 학력이 차등적으로 평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대학의 서열은 해방직후 미군정의 선별적인 대학지원정책으로부터 기원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한반도에서 대치하는 상황이었기에 정치적인 이유에서 제한돼 있는 자원을 일부 대학에만 투자했다. 미군정은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6개 대학을 통합해 서울대를 설립하고, 대부분의 자원을 서울대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국립대인 서울대와 달리 사립대의 경우에는 미국과의 인맥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기독교 재단인 동시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교수가 많았던 연세대와 이화여대가 지원을 가장 많이 받았고, 비교적 적은 지원을 받은 고려대는 미국에 있는 연구소의 도움으로 성장의 기반을 다졌다. 불교 기반의 동국대와 유교 기반의 우리 학교는 소외됐다. 처음에는 대학 간의 격차가 크지 않았지만, 국가의 대학지원이 강화되면서 대학서열화 역시 가속됐다.
거점 국립대는 처음에는 서열이 높았지만, 김영삼 정부 이후 몰락했다. 사회전반의 운영이 국가에서 시장으로 넘어간 까닭이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제적 토대가 빈약해 대학 발전에 있어 국가의 지원이 절대적이었기에 거점 국립대는 대학서열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반면, 1990년대 이후 고등교육 대중화와 시장원리의 도입으로 시대 흐름에 맞춰 대학의 변화를 주도한 서울 지역 사립대에 국가의 지원이 증가했다. 그 결과 거점 국립대는 힘을 잃게 됐다.
일각에서는 거점 국립대의 서열이 낮아진 것은 수도권 집중 현상과 지역 내에서 국립대가 갖는 기득권에서 기인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거점 국립대가 대학서열에서 우위를 빼앗겼다 하더라도, 지역 내 자원은 여전해 대학 내부의 변화가 적다는 것이다. 춘천교대 김정인 교수는 “지역 내에 있는 다른 대학과의 관계에서 차지하는 우위 때문에 거점 국립대가 혁신 노력이 부족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학벌주의의 오늘
근대 대학이 출발할 때부터 차츰 형성돼 온 대학서열은 조금씩 변화해왔지만, 소위 ‘명문대’는 오랜 기간 동안 상위 서열을 유지했다. 그 결과로 특정 대학 출신들이 사회적 권력을 독점하면서 ‘대학서열체제’가 형성됐다. 이렇게 구축된 대학서열체제에 의해 학벌에 대한 평가에 차이가 생기고, 그 결과로 특정 학벌이 사회 전반의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고시 제도를 통해 고위공무원이나 법조인을 선발했다. 선발된 이들은 주로 특정 대학 출신이었기에 학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진보네트워크’에서 지난 7월 21일 안전행정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제출받은 <2014년 고위공무원(3급 이상) 출신학교별 현황>에 따르면 전체 1476명 중 △서울대가 29.4%(435명) △연세대 10.3%(152명) △고려대 9.0%(133명) 등 이들 3개 대학 출신은 총 801명으로 전체의 48.7%를 차지했다. 검사 역시 특정 대학 출신들이 주류를 이룬다. 김진태 의원이 올해 현직 검사에 대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1983명 가운데 서울대 출신이 37.1%(736명)으로 가장 많고, 고려대와 연세대가 각각 18.3%(362명), 10.3%(204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3개 대학 출신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5.7%에 달했다. 한국교원대 이건만 교수는 이를 두고 “같은 학벌을 지닌 이들의 동문의식이 능력주의와는 관계없이 작용해 일종의 사회 자본화가 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공천 시 경력이나 이력이 중요한 준거로 작용하는 국회의원의 경우에도, 고위공무원이나 법조인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고위공무원 사이나 법조인 사이에 학벌주의가 형성돼 있다면, 국회의원 사이에서도 학벌주의가 생긴다. 실제로 지난 제19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입학했던 대학 학부를 조사한 결과 △서울대 79명(26.3%) △고려대 26명(8.7%) △연세대 24명(8.0%) 순으로 나왔다. 3개 대학이 전체 300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3%다.
기업도 매한가지다. 지난 5월, 기업경영성과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가 2013년 매출을 기준으로 선정한 국내 500대 기업 CEO 624명 중 학력을 알 수 있는 586명의 출신학교를 조사한 결과, 서울대가 154명(26.3%)으로 가장 수가 많았다, 고려대와 연세대는 각각 80명(15.0%), 54명(9.2%)으로 뒤를 이었다.
학벌주의는 출세의 측면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끼치는 영향이 많다. 특정 학벌이 지배적인 위치에 놓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학벌주의를 학습하기 때문이다. 수능을 세 번 보고 우리 학교에 들어온 A 학우는 수험생 시절 명문대에 다니는 형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A 학우는 “부모님에게 받는 칭찬 때문에 형제 사이에도 서로 우열감을 느낄 때가 있다”며 “형과 내 사이에는 그게 학벌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지막 시험도 잘 못 봤으면, 평생 형과 나 사이에는 벽이 있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20대는 학력위계주의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청년실업과 부모세대은퇴 때문에 자기계발담론을 수용할 수밖에 없게 돼서다. 그런데 학력위계주의는 교육이 적절한 기능을 못 해줘 학벌주의가 심화해 나타났다. 사회 전반의 학벌주의에 대한 구성원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