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강도희 기자 (nico79@skkuw.com)

연속된 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머리 위에 말풍선을 달고 대화하는 인물들. 그림이자 글, 미술이자 문학인 만화. 우리에게 만화는 쉽고 재밌고 어쩌면 약간은 가벼운 것으로 인식돼 왔다. 이는 흔히 만화방에서 볼 수 있는 코믹스나 '어린이를 위한'으로 시작하는 각종 학습 만화들에게 비롯된 편견인지도 모른다. 이런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만화를 소설과 맞먹는 '문학 장르'로 내세운 분야가 있으니 바로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다.

▲ 그래픽 노블 전문 잡지 'Graphic Novel' /ⓒ피오니북스
문학이라 불리고픈 만화 그래픽 노블
직역하면 ‘그림소설’, 번역하면 ‘문예만화’인 그래픽 노블은 그림(graphic)에 바탕을 둔 만화의 칸 형식을 띄면서도, 소설(novel)만큼 확고한 주제의식과 복잡한 스토리라인으로 구성된 만화 장르다. 이는 미국 만화계의 거장 윌 아이즈너의 만화 ‘신과의 계약’에서 처음 쓰인 만큼 일반적으로 영미권이나 유럽의 단행본 만화를 일컫지만, 비슷한 형식이라면 국내 만화도 얼마든지 그래픽 노블이라 부를 수 있다. 그래픽 노블 전문 잡지 ‘Graphic Novel’을 발행하는 출판사 피오니 박경돈 대표는 “그래픽 노블의 범위는 굉장히 넓다”며 이를 한정하는 명확한 테두리는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히 아는 ‘원피스’, ‘나루토’ 등의 코믹스와는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확연히 다르다. 박 대표는 “짧은 기간에 일정 분량을 연재해야 하는 코믹스는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정해진 틀이 존재한다”며 “그에 반해 그래픽 노블은 작가가 좀 더 여유를 갖고 자신만의 독창적, 실험적 예술을 펼칠 수 있다”고 형식적 차이를 설명했다. 가령 코믹스는 흑백의 그림체, 비슷한 말풍선과 기호들, 손바닥만 한 책의 크기 등 공식이 정해져있지만 그래픽 노블은 작가마다 그림체, 전달 방식, 제본 방식까지도 천차만별이다. 미국 만화가 크리스 웨어의 그래픽 노블 ‘지미 코리건’은 대부분의 활자를 작중 인물의 독백으로 처리하고 책 중간에 독자를 위한 ‘오려만들기 코너’나 ‘읽기 설명서’ 같은 페이지를 넣는 등 실험적인 구성으로 전통적인 만화의 형식을 단번에 깨뜨렸다.
한편 그래픽 노블은 기존 만화가 가진 시각적인 면을 넘어 서사 구조를 더욱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내용적 차이도 보인다. 코믹스는 코믹(comic)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 목적이 재미를 주는데 가깝지만 그래픽 노블은 성인 독자를 인식하고 보다 진지하고 성숙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문학을 닮았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대인의 삶을 다룬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만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해 그래픽 노블이 단순히 두꺼운 만화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본격 문학의 범주에 들어섰음을 보였다.
 

▲ ⓒ아름드리미디어/ⓒ세미콜론

 

 

 

 

 

 

 

 

우리에겐 아직 생소한 그러나 매력적인
미국이나 유럽에선 그래픽 노블이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을 정도로 보편적이지만 국내 시장에선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영상대학교 만화창작과 박석환 교수는 “망가, 웹툰 같은 연재물의 영향으로 한국의 만화 독자들은 만화를 휙휙 넘기거나 스크롤을 내려서 보는 것에 익숙하다”며 “이로 인해 단권 형태의 그래픽 노블은 아직까지 낯선 장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더 진지한’ 만화를 찾는 일부 마니아층의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요즘엔 ‘배트맨’, ‘스파이더맨’을 비롯한 액션 히어로 만화도 넓은 의미의 그래픽 노블에 포함되면서 그래픽 노블의 인기에 한몫하고 있다. 박 대표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원천으로는 그래픽 노블만 한 게 없다”며 “그래픽 노블의 풍부한 스토리가 여러 장르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이의 이야기와, 소설이 보일 수 없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한꺼번에 갖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끈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도 원작은 그래픽 노블이다. 근본적으로 ‘만화’기 때문에 쉽고 재밌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호메로스의 시곡 ‘오딧세이’를 만화로 풀어낸 가레스 하인즈의 동명의 그래픽 노블은 전문가들도 어려워하는 600쪽 분량의 고전을 한 권으로 압축했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는다. 독서의 계절이라 하기 에는 너무 추워져버린 요즘. 이번 주말만큼은 이불 속에 틀어박혀 그래픽 노블 한 권과 함께 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