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프로듀스 101’, 일명 ‘프로듀스 원오원’이 지난 1월 22일부터 방송을 탔다. 정확히는 100여명에 가까운 걸그룹 지망생들이 11명이 뽑히는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프로그램 콘셉트이다. 이렇게 뽑힌 11명은 1년 정도 프로젝트 그룹으로 활동 예정이다. 방영 전, 101명이 경쟁한다는 파격적인 프로그램 기획 의도 덕분에 비판도 많이 듣고, 덩달아 화제성도 몰고 다녔다. 우리는 이 프로그램에 대한 옹호와 비판을 들여다보면서, 예술의 양면성 혹은 이중성을 보고자 한다.
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본격적인 예술은 재밌게도 자본과 함께 탄생하였다. 우리가 ‘예술’이라는 주제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작품들은 든든한 금전적 후원에서 탄생하였다. ‘패트런(Patron)'들의 예술에 대한 욕망과 고급문화에 대한 갈망이 우리가 순수예술 혹은 고급문화라고 일컫는 것들을 탄생시켰다. 결국 예술은 애초에 탐욕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미적 취향이 지금의 대중문화와 비교했을 때 가지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목적’이다. 적어도 그들은 예술을 자본의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예술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이었고, 부호들은 그들의 능력을 바탕 삼아, 문화적 자본을 축적하고 이를 자랑으로 여기며, 향유했다. 하지만 현대의 대중문화와 예술행위는‘상업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예술을 위해 자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전도되어 자본을 위해 존재하는 예술로 그 형태를 규정하게 되었다. ‘프로듀스 101’이 가진 함의는 바로 이러한 자본과 경쟁의 논리에 있다. 
근대를 거치면서 예술은 자본에 굴복했다. 우리는 박태원의『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을 읽으면서 그 경계에 있는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문학’이라는 예술행위를 추구하지만, 밥벌이가 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인간. 구보씨는 자본 앞에서 나약해져버린 예술가의 초상을 보여준다. 구보씨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순간,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는 일시에 패닉 상태에 빠진다. 엘리트 작가가 쓰는 통속소설은 사실 바로 ‘먹고 사는 문제’에서 탄생한다. 고전소설의 영웅소설도 실상 먹고 살 방법이라고는 글 밖에 없었던 몰락한 양반들의 손에서 탄생하지 않았는가.
이제 예술과 문화는 철저히 자본주의와 공존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물질화되는 세상에서 예술과 인간 정도야 물화되는 것이 뭐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또한 현실적으로 자본과 경쟁이 일상에 침투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적 인식 지평이 인간의 존엄마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01명의 소녀들을 무한 경쟁으로 몰아넣고, 순수하게 시청자들의 투표만으로 11명을 뽑는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모든 것이 물화되어도 물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존재’이다. ‘존재’가 물화되는 순간, 어떠한 생명이라도 쉽게 폐기되어 다루어질 것이다.
예술의 정신은 자유와 표현이다. 또는 자유로운 표현이 예술을 정의한다. 우리가 행하는 소비와 즐거움에 대해서 우리는 성찰하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경쟁에서 도태되어 절벽에서 떨어진 이들의 눈물 한 방울을 염려하는 마음, 이 하나만 부탁하면서 말을 마치고자 한다.

이대원(국문과 석사과정 1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