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캠 만남 - 박찬원(경영 64) 동문

기자명 박형정 기자 (hj01465@skkuw.com)

 

지난 38년간 마케팅 전문가로서 대기업에서 일한 박찬원(경영 64) 동문. 하지만 그는 지금 문막에 자리한 한 농장에서 돼지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다. “인생은 말이야, 하나의 작품이야.”라는 말과 함께 일흔이 넘은 나이에 사진작가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박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찬원 동문 제공


성대신문, 혼란스러운 대학생활을 풀어냈던 곳
박 동문이 대학에 입학한 시기는 군사 정권 시절로 시위와 휴교의 연속이었다. “우리 때는 매년 시위를 했어. 4월이 되면 시위를 시작해서 방학까지 연결돼 수업을 거의 못했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어수선한 시절에 의미 있는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던 박 동문은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바로 성대신문사에 들어갔다. 인터넷도 없고 신문도 많이 없어 읽을 것들이 귀했던 시절, 성대신문은 학우들에게 굉장히 인기 있었다. 신문이 나오는 날은 학우들이 당시 신문사가 있었던 학생회관 앞에 줄을 서서 신문을 받아가곤 했다. 이렇듯 학우들에게 사랑받던 성대신문이지만 한때 발간을 쉴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박 동문은 신문의 역할에 대한 본인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박 동문이 편집부장을 지냈던 1969년, 대통령의 3선 개헌 때문에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당시 학교 정문 앞에는 군인들이 주둔했고 조기 방학을 해 학생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가 텅 비어 신문을 읽는 독자가 없었지만 박 동문은 그때 4편의 신문을 발간했다. “아마 그 당시 대학신문 중 발간을 멈추지 않은 곳은 성대신문이 유일할 거야. 신문이니까 당연히 휴교령과 상관없이 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는 언론 검열 때문에 말하고 싶은 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은유적으로 ‘대성로에 떨어져 있는 낙엽 한 조각’을 클로즈업한 사진을 실으며 당시 상황을 보여줬다. “텅 빈 캠퍼스를 표현한 거야. 그게 나름대로 부당한 휴교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어. 다 죽었는데 우리만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었지.”

‘내가 하면 다르다’, 마케팅에서 배운 인생 가치관
박 동문은 학생 기자 생활을 하며 한때 기자를 꿈꿨지만 직업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군사 독재 시절이라 쓰고 싶은 기사를 마음껏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자신의 전공을 살려 회사에 취직했다. 과거 삼성 계열이었던 제일제당에 취직한 그는 마케팅 업무를 맡았다. “내가 입사하던 때는 마케팅 분야를 개척해야 하는 시기였어. 내가 마케팅 업무를 시작했던 시기에는 ‘마케팅’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지.” 그 당시 마케팅이 미지의 영역이었던 만큼 박 동문은 이론적으로 배우기보다 직접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쳤다. 탤런트 김혜자가 "그래, 이 맛이야!"를 외치던 광고로 유명했던 ‘다시다’ 제품은 박 동문의 현장 마케팅의 대표적 사례다. 당시 제조 공장에서는 소비자 선호도의 반영 없이 다시다를 생산하기로 했다. 하지만 소비자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박 동문은 직접 다시다를 넣고 끓인 국을 들고 아파트를 찾아가 주부들의 반응을 묻고 시장조사를 했다. 제대로 된 소비자 표본에 근거한 조사는 아니었지만, 소비자의 선호도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것 덕분에 영업의 막대한 손실이 날 뻔한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고객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고객을 만족하게 하면서 회사가 이익을 얻는 것이 마케팅이야. 고객의 트렌드를 파악해서 타 회사와 다른 특색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지.” 남과 차별화되면서 고객을 만족하게 하는 그의 마케팅 전략은 삼성 자동차 광고 슬로건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삼성 자동차 마케팅 실장으로 근무할 시절에 개발한 ‘Better & Different’라는 광고 슬로건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고에 사용되고 있어. 그런 것을 보면 뿌듯해.” 그가 만든 ‘Better & Different’ 전략은 이후 순수 예술 사진을 찍을 때도 통했다. 언뜻 이윤을 추구하는 마케팅과 순수 예술은 상반된 분야처럼 보이지만 박 동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소재와 표현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었다. “예술을 그저 아름답고 모양이 근사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마케팅처럼 콘셉트를 설정하는 것과 그 콘셉트를 어떻게 표현해내는지가 굉장히 중요해.” 그렇게 해야만 사람들이 같은 제품 혹은 같은 사진임에도 싫증 내지 않고 계속 찾게 된다는 것이다.

카메라를 손에 든 늦깎이 학생
박 동문은 40년 가까이 일한 마케팅 업계에서 은퇴하고 우리 학교 석좌 초빙교수로 위촉돼 학생들에게 마케팅 전략 수업을 했다. 하지만 그는 3년 뒤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새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강의를 맡는다는 것은 굉장히 소중한 의미야. 근데 나에게는 강의가 그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거든. 그래서 내가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강의를 그만둔 후, 일을 해오던 것이 익숙했던 그는 새로운 일거리를 찾으려 했다. 그것이 바로 사진 대학원 진학이었다. 사실 그 전부터 평생교육원에서 사진 강좌를 수강하며 취미생활로 즐기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30년은 무언가를 해야 할 텐데 사진을 취미생활로만 즐기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고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그는 순수사진 전공의 예술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에도 취미가 있었어. 그래서 남은 인생동안 사진을 할 것이냐, 수채화를 할 것이냐 고민했어. 근데 그림은 계속 앉아서 하는 건데 사진은 밖을 돌아다니며 찍어야 하기 때문에 나이 들어서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더라고. 그래서 사진을 선택했지.” 우연찮은 계기에 의해서 선택한 것이 운명을 좌우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간 예술 대학원 사진학과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박 동문이 활동했던 분야와 다른 분야를 뒤늦은 나이에 공부하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사진 대학원에 온 친구들은 학부생 때 거의 4년 동안 사진을 전공했거든.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온 친구들이라 굉장히 뛰어나. 고수들이 오니까 내 실력은 보잘것없었지.” 경영인이었던 박 동문과 예술계에 몸담고 있던 예술인들은 옷차림, 쓰는 말, 노는 방법 등 모든 것들이 달랐다. 그들에게는 상식적인 이야기가 박 동문에게는 어려운 주제였다. 마치 먼 외국에 오지탐험을 하러 간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진짜 어려웠어.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기 마련이야. 그래서 어울리기 위해 얼굴도 두꺼워지고 어떤 부분에서는 일부러 유치해지곤 했어. 때론 낯선 것들을 극복할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이야.”

그가 사진에 담은 ‘생명의 순환’
박 동문의 대학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콘셉트를 정하고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던 박 동문은 구체적인 사진 계획서를 써 오라는 수업 과제에 자신의 고향인 대부도를 떠올렸다. 개발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어가는 대부도를 안개가 감싸주는 콘셉트의 사진을 찍어갔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너무 일반적이었던 거지.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 하는데 그냥 아름다운 풍경 사진에 불과했던 거야.” 함께 수업을 듣는 동료들과 교수님으로부터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후 박 동문은 다시 대부도를 탐색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대부도에 하나 남은 염전이었고, 염전을 소재로 찍은 사진은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전과 다르게 염전 사진은 ‘생명의 순환’이라는 의미가 부여된 사진이었다. 염전에 죽어있는 하루살이를 찍은 사진이었지만 박 동문에게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루살이가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지 않아? 반짝이는 것은 하늘의 별이고. 하루살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여행을 왔다가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중으로 생각했어.” 그는 염전에 죽어있는 하루살이의 모습을 새로 태어나는 개념으로 바라본 것이다. “사람은 8, 90년을 사는데 하루살이는 하루만 산다면 이렇게 불공평한 것이 어딨어.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을 리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하루살이에게 죽음이란 여행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어울리더라고. 이게 내 대학원 졸업 작품이야.” 생명의 순환이라는 개념과 내세의 개념은 그 이후 돼지를 소재로 한 사진 작품에 또 한 번 등장했다. 돼지를 소재로 삼게 된 것은 돼지가 박 동문에게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돼지라는 별명이 있었어. 그래서 그것을 주제로 쓴 ‘돼지’라는 수필을 중학교 교지에 실은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내 글을 다른 반 학생들에게도 읽어주더라고.” 그것이 인연이 된 것일까. 그는 문막의 한 돼지농장에서 돼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일흔이 넘은 박 동문에게 돼지는 생명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동물로 다시 다가왔다. 돼지는 태어나서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않은 채 도살당하니 살아있는 의미가 없는 불행하고 비참한 동물이었다. 그렇지만 박 동문은 현세만을 보지 않았다. “돼지는 1년에 2~3번 정도로 임신해서 한 번에 12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아. 그리고 수명이 10년에서 15년이지만 6개월이면 다 자라. 그렇기 때문에 컸다 싶으면 바로 도살장에 가게 돼. 현세에는 존재 이유가 없는 쓸모없는 동물인 것 같지만 죽고 나면 돼지의 삶은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되지. 그러면 돼지는 다음 세상에 가서는 훌륭하게 태어나는 거야.” 그가 생각한 돼지의 삶의 의미는 인간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순간 돼지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박찬원 동문 제공
ⓒ박찬원 동문 제공


젊음은 열정을 실천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박 동문은 나이의 한계에 자신을 가둬두지 않고 끊임없이 차별화된 새로운 도전을 했다. 그는 돼지의 사진을 찍기 위해 작년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매주 2박 3일을 양돈장에서 먹고 자며 사진을 찍었다. 사실 사진을 찍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돼지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돼지우리에 들어가 철퍼덕 주저앉아 돼지들과 대화하며 사진을 찍은 그의 카메라에는 아직도 돼지 똥 냄새가 배어있다. “양돈장 바닥에 카메라를 대고 어미젖을 올려다보니 굉장히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았어. 근데 찍으려는 찰나에 어미 돼지가 당황했는지 오줌을 누더라고.” 뜨듯한 오줌 보라가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흠뻑 맞았지만, 사진 찍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돼지가 움직이지 않아 사진 찍기 좋은 기회여서 오히려 더 누길 바랐다는 그의 모습에서 소년처럼 반짝이는 눈빛이 보였다. “내 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거야.” 자기가 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모토라는 그의 열정에서 날이 갈수록 빛나는 그의 젊음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