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단어에 가위를 들이대자
큰 단어에 가위를 들이대자
  • 황병준 편집장
  • 승인 2017.09.04 18:00
  • 호수 16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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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사고란 머릿속 큰 단어에
정교한 가위 들이대는 일
오늘날 한국 사회에 거대한 개념들
횡행해… 과학적 사고 절실

“구분하는 것이 곧 과학이다.” 교수님께서 science(과학)와 scissors(가위)의 라틴어 어원은 같다는 것을 예로 들며 말씀하셨다. 1학년 1학기 문학입문 수업에서의 일이다. 문학을 배우는 자리에서 무슨 경위로 과학을 논하게 됐는지, 5년이 지난 지금 알코올에 풍화된 필자의 뇌로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지만 교수님께서 science를 인간의 ‘앎’ 또는 전반적인 ‘학문’의 의미로 사용하셨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실제로 영어와 프랑스어의 science는 어떤 사물을 ‘안다’는 뜻의 라틴어 ‘scire’에 기원을 둔다.

이어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왜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 두 종류밖에 없느냐”고. 상남자 화장실, 보통 남자 화장실, 여성스러운 남자 화장실이 있을 수 있고 상여자(?) 화장실, 보통 여자 화장실, 남성스러운 여자 화장실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열을 올리셨다. 라틴어 어원까지 논하시던 교수님의 말씀이 용두사미가 되어가는 것 같아 기막히고 웃겼지만, 웃어넘길 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교수님의 말씀은 ‘과학적인 사고’의 본질에 닿아 있었다.

과학적인 사고란 머릿속 큰 단어에 정교한 가위를 들이대는 일이다. 가위로 종이를 오려 모양을 내듯, 경계 없는 생각들에 경계선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찰스 다윈은 ‘종’이라는 개념에 가위를 들이댄 과학자였다. 그의 저서 종의 기원에서 그는 비둘기를 무려 40여 종으로 나눴다. 비둘기는 그에게 ‘생명은 독립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공통조상으로 갈라져 나왔을 것’이라는 영감을 줬다고 알려진 동물이다. 그는 ‘부리의 모양’과 ‘털의 색’ 등을 기준으로 비둘기라는 개념을 잘게 쪼개고 연구해서 종의 기원에 다가갔다. 1859년 11월 24일 종의 기원 초판 1250부는 발행 하루 만에 매진됐고 세상은 뒤집혔다. ‘종’이라는 거대한 개념은 설교(說敎)의 영역을 벗어나 과학적으로 논(論)할 수 있게 됐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큰 단어들이 횡행한다. 진보와 보수, 남자와 여자 같은 거대한 개념들이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 최근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의 역사관 논란은 그 예다.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 축사에서 1919년 상해 임정 수립을 건국으로 규정한 마당에 그러한 정부의 장관 될 사람이 ‘1948년 건국’을 말해도 되겠느냐는 것이 논란의 골자다. ‘진보’여야 할 사람이 ‘보수’의 말을 하니 헷갈리는 모양이다. ‘진보는 이러해야 해’ ‘보수는 저러해야 해’라고 뭉뚱그려 믿어버린 결과다.

남녀논쟁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자는 다 그래’ ‘한국 여자는 다 그래’라는 식의 말들이 하루가 멀다고 인터넷을 달군다. ‘한국 남자’ ‘한국 여자’라는 거대한 단어 아래 ‘김철수’와 ‘이영희’라는 이름의 개별적 실존들은 뭉개진다.

과학적인 사고가 절실하다. 허술한 믿음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 큰 글씨 거칠게 적힌 깃발들로는 서로 대화할 수가 없다. 남의 깃발은 나에게 적기(敵旗)고 나의 깃발은 남에게 적기일 뿐이다. 큰 개념들을 잘게 오려서 펼쳐놓고 논해야 한다. 가위가 필요한 것이다.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거대하고 경계 없는 개념들은 무엇인가. 큰 단어에 가위를 들이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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