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서예라는 낯설고도 친숙한 장르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조선조 말 유학자이셨던 조부와 평생 흰 두루마기와 상투를 고수하셨던 부친께서 평생 작품활동을 하셨기에 그러한 가정에서 자라난 나는 어렸을 적부터 먹과 화선지와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이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온 나도 아직 서예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굳이 표현한다면 서예는 점과 선과 획을 사용해 문자를 표현하는 조형예술이자 상생의 예술이다. 점과 선이 만나고 큰 점과 작은 점이 만나며, 긴 선과 짧은 선이 어우러지는가 하면 흑과 백이 뒤엉킨다. 이렇듯 서로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되 균형을 파괴하거나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는다.

한편 점, 선, 획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여백의 미’인데 여백이라 해서 ‘무’ 또는 ‘허’와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여백이 존재함으로써 ‘실’이 살아나는 것이다. 장단, 미추, 음양, 대소 등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대립이 아닌 대대(對待), 즉 서로를 기다리는 구도를 취한다. 이렇듯 서예는 동양의 사상, 음양의 이치를 잘 나타내준다. 동양적 문화정신의 중심에는 언제나 동양의 전통예술이 있어왔고, 동양 전통예술의 중심에는 언제나 서예가 있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동양에 서예가 있다면 서양에는 ‘컬리그래피’라는 문자예술이 있다. 문자를 심미적 대상으로 놓고 창작하는 것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지만 선의 질이라든지 형태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붓을 사용하는 서예는 딱딱한 펜이 아닌 붓으로 만가지 형상을 태동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율동감과 부드러움 또한 겸비하고 있다.

■지난 10월 ‘선(線)을 넘어 합(合)으로’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3회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에 대해. 그리고 이 행사 외에도 현재 우리나라에서 대형 서예전 및 공모전들이 잇따르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현재 세계 여러 곳에서 유명·무명의 각종 비엔날레들이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서예를 주제로 한 행사는 전북비엔날레가 유일무이하다. 서예는 그만큼 홀대받는 예술이요, 세상 사람들의 관심 밖에 머무는 예술임을 실감할 수 있다. 이번에 개최된 전북비엔날레는 동양의 문화정신을 오늘에 계승하는 동시에 오늘의 시대예술로 부활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서예문화의 세계화운동이며 2001년 정부의 9대 문화행사 중 하나이다. ‘본전시’,‘특별전’,‘부대행사’등 무려 15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전시와 수준있는 작품들은 선의 예술에서 또 다른 차원의 예술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비엔날레의 주제인 ‘선을 넘어 합으로’는 시와 그림과 함께 서예가 그 경계를 넘어 한 면의 종이 위에서 합을 이루자는 초월의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서예전과 공모전이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나는 ‘다다익선’이라는 말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특히 공모전은 경쟁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꾀하는 동시에 신진 서예가들이 실력을 펼칠 기회를 마련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침체되어있던 서예계에 최근 실용화, 대중화바람이 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선비 혹은 지식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인식되어온 서예는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타문화와 비교했을 때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며 또 한자로만 구성된 작품들이 있어 외면 받기까지 하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문장의 내용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 서예이기에 이러한 점들을 딛고 일반인들이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계획된 것이 있었다. 전북비엔날레 부대행사 중 서예의 실용화전이 바로 그것이다.

보수적 전통의 선을 넘어 생활 속으로 들어가자는 의도를 가지고 넥타이·셔츠 등의 의상과 악세사리, 커텐·책꽂이·책상 등과 서예를 접목시켜 독창적이면서도 기품 있는 생활용품을 제작했는데 관객들로부터 매우 큰 호응을 얻었다. 이는 단지 순수예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화, 저변화를 통해 서예가의 혼이 생활 속에서 녹아날 때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안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