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일러스트 l 유은진 기자 qwertys@
일러스트 l 유은진 기자 qwertys@

영화보다는 전시를, 영상보다는 실제 사물과 현상을 골똘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기에, 살면서 헤아릴 수 없는 원고를 작성했음에도 영화평을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정하고 영화에 대해 한번 써보기로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떤 가족>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원제는 <좀도둑 가족万引き家族>으로 한국어 번역보다 훨씬 솔직하다. 말 그대로 ‘남의(이 버린) 것’을 취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가족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 학자의 칼럼은 지극히 ‘일본적인’ 이 영화의 핵심을 ‘포스트자본주의’나 전후 일본의 사회문제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내가 궁금한 것은 저성장시대의 모순이나 일본적인 특수성이 아니다. 나의 관심사는 이를테면 실패자를 그려내는 방식 같은 것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팬은 아니지만 개봉작을 모두 보게 되는 이유는 내가 실패자이기 때문이고, 그러다보니 실패자가 영화에서 그려지는 방식이 궁금해서였다.

한국영화가 실패자를 그려내는 방식은 모처럼 단순하다. 언젠가 성공하는 잠재적 히어로이거나 흑화된 악인이거나. 실패에 대해 원인을 따지고 해결을 하려들고 나아가 구제하려 간섭하기에, 전자나 후자나 크게 차이는 없다. 연민이나 동정의 시선인가, 아니면 완벽한 타자화(짐승화, 비인간화)인가 전략이 다를 뿐이다. 비단 영화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가 실패를 그려내는 방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과 친구, 연인이, 선생님과 동료가, 그리고 친밀한 서클을 벗어난 관계에서도 실패자에 대한 태도는 거의 동일하다. 적극 개입하여 도와주거나 포기하거나. 실패와 한 뼘의 거리를 두는 법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과의 거리 감각을 아직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일본사회의 모순을 포착해서가 아니라 타인과의 거리를 묘사하는 특수한 방식 때문에 ‘일본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실패자에 대한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 또한 그렇게 그려진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처럼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기를 실패하고, 아들은 아들이 되기를 실패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나마 아름다운 스토리이다. <어떤 가족>에서 우리는 지독한 문제아들의 박물관을 대면한다.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키고, 남의 아이를 데려와 키우거나, 노인의 죽음을 감추며 연금을 대리수급하고, 동생의 이름으로 유흥업소에서 ‘가슴을 흔들며’ 돈을 벌면서도 다 같이 모여 맛있게 나베를 먹을 수 있기에, 만약 어빙 고프만이 스티그마(Stigma)를21세기에 썼다면, 책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심각한 ‘사회적 얼룩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낙인된 주체들(stigmatized subject)’을 아무렇지 않게 묘사한다. 감독의 시선에는 얼룩의 근원을 이해하고 교화하려는 어떠한 간섭도 없다. 오히려 가시적인 것은 거리감이다. 그것은 때로는 실패자의 인생도 존중해주는 자세로, 혹은 남의 일에 무관심한 냉정함으로도 드러난다. 실패에 대한 인식은 그래서 더 문제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들어오고 보는 한국적 거리 감각에 익숙한 나로서는 늘 궁금하고 새로운 것이다. 실패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태도도, 실패자가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도, 손을 내밀거나 붙잡아주는 것 없이 적정한 거리를 만드는 방법도. 이제까지는 감독 자신도 그 한 뼘의 거리에 대해 어떠한 정답도 내놓지 않고 있는 듯하다. 대신 또 다른 실패의 스토리를 찾아 집요하게 묻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집요함에 나는 집요하게 매료되어 왔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실패가 거기에 있기에, 그것을 한 번에 용서해주는 자기위선보다는 그대로 덤덤히 내버려둠으로써 다른 한 발을 내딛어도 보고 싶기에.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거리감을 양해받고, 또 타인의 실패를 기꺼이 양해해주고 싶은 작은 선의를 나는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계속 보고 싶은 것이다.

김계원 교수
김계원 교수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