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이광수는 상해 <독립신문>(1920.12.18.)에 「삼천의 원혼」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주역으로서 독립신문사 사장 겸 주필이기도 했다.

“2년 시월지변(十月之變)에/ 무도한 왜병의 손에/ 타 죽고 맞아 죽은 삼천의 원혼아/ 너의 시체를 묻어줄 이도 없구나/ 너희에게 무슨 죄 있으랴/ 망국 백성으로 태어난 죄/ 못난 조상네의 끼친 얼(孼)을 받아/ 원통코 참혹한 이 꼴이로구나” (「삼천의 원혼」부분)

임시정부 2년, 1920년 ‘10월의 변’이라는 것은 소위 ‘간도참변’이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정하고 서북간도에 산재한 120여 개의 독립군 단체를 통일적으로 조직하여 대한독립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에 일제는 10월 12일 간도로 출병하여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에 돌입했다. 김좌진·홍범도 등이 지휘하는 독립연합군은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전투이다.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조선인사회를 초토화시키고 학살했다. <독립신문>은 ‘간도참변’ 특집호(1920.12.18.)를 발행하여 조선인 3,700여 명이 학살당했다고 보도하고,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 동포
를 위로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광수는 시를 발표했다. 이광수 시는 ‘참사’에만 주목했다. 그는 “망국 백성으로 태어난 죄”와 “못난 조상”을 원망하고 ‘준비 없이’ 전쟁을 벌인 항전지도부를 비판했다.

이러한 회의론과 준비론, 간도 동포의 낙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임시정부는 「국무원 포고」(제3호)를 발표했다.

아아 저 수없는 충혼을 무엇으로 위로하며, 유리하는 동포를 무엇으로 안위하리까. 오직 독립의 대혈전에 적의 목을 베어 대한의 독립문에 높이 닮이 있을 뿐이니 대한의 아들과 딸들은 지금 이 한 마음으로 하나 되었나이다. 아아 독립혈전에 용장한 선봉이 되신 충의로운 간도 백만 동포여, 이천만의 형제자매와 그네의 임시정부는 일심하야 제위의 뒤를 따르나니 행여나 일시의 고초에 낙심하심이 있을쏘랴. (중략) 우리 독립운동의 근본방침은 오직 혈전에 있는지라. (<독립신문>, 1921.1.15.)

이광수가 간도 동포를 피해자로만 보았다면, 임시정부 국무원은 간도 한인을 독립전쟁의 주체로 파악하고 혈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이광수는 1921년 2월 독립신문사 사장에서 사퇴하고 귀국했다. <민족개조론>을 집필했다.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힘의 논리에 매몰되었다. 강력한 일본을 통한 자기 확장이 민족의 길이라고 주장하기 이르렀다. 강력에의 맹신과 공포는 강자에의 굴복으로 귀결되었다.

1920년 간도참변 때 명동학교는 불탔다. 1922년 명동학교는 재건되고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는 1925년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간도 조선인들에게 간도 토벌은 시련이었지만, 투쟁과 승리와 패배는 그들의 역사이자 자부심이고 정서구조가 되었다. 이런 북간도에서 「서시」가 탄생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