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손민정 (0614smj@naver.com)

인사캠 만남 - 이상근(영상 99) 동문

사진 ㅣ류현주 기자 hjurqmffl@
사진 ㅣ류현주 기자 hjurqmffl@

 

“이 사무실에 외부인을 초대하는 것은 처음이에요.”
영화감독 이상근(영상 99) 동문은 멋쩍게 웃으며 음료수를 탁자에 내려놨다. 그의 사무실 벽에는 ‘Be Original’이라는 문구가 붙여져 있었다.
이 동문을 ‘영화사 외유내강’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다른 학교 워크샵까지
따라가 기술 익혀 꾸준히 발전하는 감독 되고 싶어

영상물을 보며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

어릴 적부터 영상을 보는 것을 즐기던 이 동문은 현재 그의 영화사가 위치한 서울 강동구에서 나고 자랐다. “영상물은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어요.” 영상을 보며 그는 자연스럽게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그가 구체적으로 드라마 PD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은 드라마 ‘아름다운 천국’을 보고 난 이후다. ‘아름다운 천국’에 나오는 신문방송학과 이야기는 그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를 포함해 당시 그 드라마를 보고 드라마 PD를 꿈꾸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 동문은 드라마가 아닌 다른 영상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 동문은 막내 삼촌이 자신을 여러 극장에 데리고 다니며 영화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직접 친구 집에 가서 비디오를 빌려보기도 했다. 그는 지금과 다르게 줄을 서서 표를 사고는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또래들과는 다르게 저는 중학교 때부터 시사회에 종종 갔어요. 잡지를 보면 시사회 초대권이 있었거든요.” 이 동문은 그 초대권을 오려서 영화를 보러 갔다. 그러나 그가 영화를 본 것은 순전히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딱히 학문적 탐구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어요. 남들보다 약간 더 좋아하는 정도였죠.”

어렸을 때만 해도 꿈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 없었던 이 동문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공부를 진짜 하나도 안 했어요. ‘언젠가는 잘 되겠지’하는 희망적인 상상만 하며 시간을 보냈죠.” 그의 첫 대학수학능력검정시험(이하 수능) 점수는 절반을 겨우 넘긴 정도였다. 공부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시험을 보기 전부터 재수를 고려하고 있었던 그는 성적을 보고 확고하게 재수를 결심했다. “그런데 재수 때도 공부를 안 했어요. 삼수를 결심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죠.” 삼수를 시작하며 이 동문은 한 번도 학원을 빠지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실제로 그는 추석 당일만 제외하고 매일 학원에 나갔다. 하지만 점수는 원하는 만큼 크게 오르지 않았다. 특히 수학이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 이 동문은 수능 당일에야 점수가 크게 올랐다고 말했다. “재밌는 것은 주관식을 -1과 0으로 찍었는데 그 두 문제를 맞았다는 거예요. 하늘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잘못하면 우리 학교에 입학하지 못 할 뻔했다며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영상학과와의 만남
어릴 적 꿈처럼 이 동문이 처음에 가고 싶었던 학과는 신문방송학과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신문방송학과의 커리큘럼은 그의 예상과 매우 달랐다. “저는 그전까지 신문방송학과가 실용적인 기술을 배우면서 실제로 영상을 제작해보는 학과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매스미디어 등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공부를 하는 학과라는 거예요.” 당시에는 연기예술학과나 영화과 등 다른 대안은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그의 막막함은 더욱 컸다. “그러다 성균관대학교에 영상학과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영상을 제작하는 과정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배운다는 이야기에 동문은 영상학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영상학과에 진학하면 하고 싶은 공부를 다양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영상학과를 선택했어요.” 그는 당시 영상학과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 1차 합격자 중 꼴찌로 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동문이 처음으로 영화감독을 꿈꾸게 된 것은 2학년 1학기 영화 수업을 통해서였다. “5분 분량의 짧은 단편영화를 찍는 것이 과제였어요. 처음 해보는 거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감대로 찍었죠.” 뜻밖에도 그렇게 찍은 영화는 성공적인 결과를 냈고 교수에게 칭찬도 받았다. “그래서 단편영화를 또 만들었더니 그것도 반응이 좋아서 제가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죠. 젊었을 때는 모두 자기가 천재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는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수업에서 찍은 것이 단편 <꼽슬머리>다. “곱슬머리도 아니고 꼽슬머리예요. 당시에는 제 곱슬머리가 너무 싫었거든요.” 이어 그는 물론 지금은 곱슬머리인 것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남들이 기억하기도 쉽고 예술가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터닝포인트였어요.” 그 수업을 맡은 교수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영화 <미지왕>을 제작한 故김용태 감독이었다. “칭찬해주면서 학생의 재능을 북돋는 것을 잘하는 분이었어요. 동네에 찾아가면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시고 교수보다는 친구 같은 느낌이었죠.” 그는 “감독님께서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며 김 감독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다양한 경험과 함께한 대학 생활
“그때는 그냥 영화가 재미있었어요.” 교양 과목 조별 과제는 그가 혼자서 모든 과제를 해결하는 성격이라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전공 수업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제 작품 하나 찍으면 다른 친구 작품 도와주고 그렇게 품앗이 형태로 과제를 했어요. 같이 밤새우면서 제가 찍고 싶은 대로 찍었죠.”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술을 마시는 등 이 동문에게 대학 생활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정문에 들어가면 왼편에 청룡상과 함께 조그만 잔디밭이 있었어요. 거기서 술을 많이 마셨죠. 그때는 금잔디 광장에서도 앉아서 많이 놀았어요.” 그가 주로 배달 시켜 먹었던 식당은 ‘달나라 분식’, ‘성균원’ 등이었다. “성균관대학교 근처 술집이 예전에는 안주로 유명했어요. 1만 3000원짜리 스페셜 안주를 시키면 싸구려 튀김을 쌓아줘서 네다섯 명이 배부르게 먹었어요.” 그는 그중에서도 ‘캠브릿지’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또한 이 동문은 대학을 다니며 견문도 넓어졌다고 말했다. 주변 친구들을 통해 여러 영상물을 접한 덕이다. 고전 영화를 깊게 탐구하는 ‘씨네키즈’,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 뮤직비디오 좋아하는 친구 등 그 종류 또한 다양했다. “서로가 조금씩 그 지식을 흡수했던 것 같아요. 저는 어느 하나에 깊이 빠지지는 않고 어느 영화든 나름대로 다 재미있어했어요.”

영화를 찍고 싶었던 이 동문은 외부 강의도 많이 들으려 다녔다. 영화과가 아니라 영상학과다 보니 영화에 대해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다른 학교 워크숍을 따라가기도 하고 미디어센터도 다녔어요. 당시에는 필름을 사용해 영화를 찍어야 진정한 영화라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배울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는 외부 강의로 배운 지식을 기반으로 학교에서 워크숍을 기획했다. “저한테 배운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식으로 이어졌죠. 동생들과 후배들을 가르쳤는데 단편영화를 필름 카메라로 찍었어요.” 이 동문은 그렇게 대학에서 맺은 인연들과 지금까지도 교류하고 있다. 다만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전공을 살린 친구들은 많지 않아요. 영화를 직업으로 삼은 친구들은 두세 명 정도인 것 같아요.”

 
영화감독을 꿈꾸던 이상근에서
영화감독 이상근까지

“졸업 후에는 결혼식 비디오를 정말 많이 찍었어요. 아르바이트로 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부탁도 많이 했어요.” 이 동문은 일이 숙달됨에 따라 남는 시간에 하객 인터뷰까지 했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 외에도 동네 재즈 바 광고, 호암아트홀 콘서트 광고 같은 것을 만들고 친구들 클래식 공연을 촬영했어요.” 그는 그렇게 최저시급으로 10년 정도 생활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영화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제가 천재인 줄 알았으니까 영화로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어요.” 이 동문은 그런 확신이 벗겨지고 나서는 ‘여기까지 왔는데 안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영화제작이 아니면 마땅히 할 것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 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데뷔를 했으니 영화감독으로 죽을 수 있게 된 거잖아요. ‘영화감독을 꿈꾸던 이상근’이 아니라 ‘영화감독 이상근’이 되겠죠.”

이 동문은 영화 <엑시트>를 만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도 입을 뗐다. <엑시트>를 만드는 과정은 하루하루가 의구심으로 가득 찬 나날이었다. 영화를 편집하면서도 관객들이 영화를 좋아할지 늘 불안했지만, 그는 주변 베테랑들의 도움을 받으며 영화를 완성했다. 적어도 손해는 보지 말아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엑시트>는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적을 거두며 흥행에 성공했다. “누군가 장난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당시에는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 기억이 말끔하지 않을 정도예요.” 모스부호를 표현하는 의성어 ‘따따따’도 마찬가지다. “유행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적당한 어감을 찾다가 그냥 썼던 것이 흥행하니 황당하고 희한했어요.”

 
앞으로의 행보
롤모델이 있느냐고 묻자 이 동문은 고민 끝에 나이를 먹어서도 꾸준히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감독 모두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저도 그런 감독이 되고 싶죠. 본격적인 작품 세계를 펼치기도 전에 사라지고 싶지는 않아요.” 그는 남들보다 시작이 느리다고 생각하다 보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다고 첨언했다. 흥행에 대한 강박도 가지고 있다. “사실 흥행에 대한 강박은 상업 영화를 찍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남의 돈을 ‘마음대로’ 쓴 거잖아요.” 또 이 동문은 물론 상업성을 위해 자신의 색깔이나 연출 감각을 버려서도 안 된다고 덧붙였다. “상업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면 그것이 예술성을 가미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거죠.”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이 동문은 잠시 생각하다 이미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아마 본인들도 찾아보면 다 알 거예요. 영화 많이 보고, 습작으로라도 시나리오 많이 써보고, 영화감독 되는 법 찾아보고.” 대신 그는 후배들에 대한 조언을 덧붙였다. “꿈을 가지기만 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쟁취할 수 없다는 말은 진짜인 것 같아요. 꿈이 있다면 자신이 그 꿈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자문해볼 시간이 필요해요.” 그는 과거에는 자신도 흘려들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며 웃었다. 그는 “아직 젊으니까 아무거나 다 해보세요. 저도 몰랐지만, 자신의 꿈과 그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빨리 깨닫는 사람이 다양한 경험을 더 많이 해볼 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많이 배우고 많이 놀아야 한다”며 인터뷰의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