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광장의 얼굴들에 대한 상상>

 

 

1. 들어가며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세월호 징하게 해쳐먹는다는 전 국회의원의 발화가 비단 그에 한정된 이야기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직은 생동해야 하는 기억과 저항의 장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쉽게 변색되는 과정을 자주 목도한다. 또는 아직까지 잔여 하는 절망과 폭력이 인식되지 않는 듯 한 모습도.

랑시에르에게 문학은 정치를 수행한다기 보다 그 자체로 정치이다. 글쓰기라는 민주주의는 저항할 수 없는 사회적 영향력이 아니다. 그것은 말의 행위, 이 행위가 형태를 만드는 세계와 이 세계를 채우고 있는 인민들의 역량들 간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감성의 분할과 관계 한다. 이 감성의 분할로부터, 킁킁대는 것처럼 취급되던 가시화되지 않는 인민, 주체들은 수면 위로 드러난다. 폭력과 억압의 장 속의 이등, 삼등 시민이 소설의 장으로 무한히 등기되는 운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동하는 움직임을 문학의 정치성 그 밖의 사람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각 가능케 할 수 있을까. 문학이 정치라면, 소설이 운동이라면, 그 운동장 밖에 선 사람들을 끌어오기 위한 힘 역시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이 지닌 힘, 리얼함은 정세적이며 맥락적이다. 그것은 외적 세계에 대한 텍스트의 미메시스의 충실성만이 아닌, 작품을 수용하는 해석 공동체 (혹은 정치공동체)의 정동과 상황에 달린 것이다.

이 해석 공동체들로 하여금 집합적 정동을 만드는 힘을 논하기 위해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빠르고 거센 움직임들을 복기한다. 그것이 유래 없이 읽혔기 때문에, 김지영은 오늘날의 수많은 김지영들의 집합 정동에 힘입어 다양한 문제를 점화했다. ‘성대현들의 분노, ‘아이린 사태’, 비평가들의 논쟁을 주축으로 한 정치적 올바름논쟁들이 그것이다.

이 다양한 결의 현상들로부터 짐작 가능하듯, 정동은 생각보다 빠르게 점화되고, 또한 빠르게 휘발된다. ‘정동은 즉자적이고 집합적이다. 때문에 그 강렬한 감각들이 지속적인 운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힘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김지영이 소환해낸 그 보편 지향적인 재현이 주조해낸 동학과 그 유효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보편의 얼굴 없음, 오혜진의 표현에 따르면 뭉특한재현에는, 그것이 가리는 수많은 존재들에 대한 물음 역시 요구된다. 모든 김지영들이 동일한 같은 존재일 수는 없다는 회의를 동반한 물음이다. 이등, 삼등시민의 상상에 대한 외연의 확장은 그 미묘한 결의 다름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이 다른 정동정체들을 쪼개는, 또는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재현의 요구에 부딪히는 것이다.

우리는 얼굴을 상상해야 한다. 리얼리즘의 전형성 위에 발 딛고 있던, 평평한, 그것을 읽는 누구로도 대체 가능한인물들에 대한 유효성을 인정하는 한편, ‘대체 불가한 얼굴들에 대한 상상이 가미되어야 한다. 소설이 실패한, 비주류의, 개인들을 주재료로 한 서술양식이라면, 그것은 곧 이 사회에 자리 없는 사람들을 가시화 하고 사회적 성원권을 부여하는 작업과도 맞닿아있을 것이다.

광장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에게, 그들의 정동을 감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소설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 앞에 무용한 서사의 힘을 물신화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을 각오하고 말을 잇는다.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정동을 옮겨 내는 소설의 힘을 믿는다는.

최은영의 <미카엘라>, 김혜진 <딸에 대하여>. 황정은 <아무것도 말 할 필요가 없다>, 소설 속 여성들이 광장으로 나가기까지의 서사를 상상하게 한다. 광장과 광장에 선 자들, 그 각각의 얼굴에 대한 상상력은 그를 목격한 이들을 광장으로 배치시킨다.

제시한 소설들의 여성화자들은 모두 광장으로 향하는 한편, 그들이 마주한 광장의 모습과 그들이 기입된 삶의 현실은 제각각이다. 그들 모두가 여성 화자라는 점은 지적되어야 마땅하나, 여기서는 그들을 보편으로서의 여성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논의는 소거한다. 여성학에서 논해지는 여성에 대해 논의할 수 없는 나의 역량부족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이 글의 방점이 찍혀야 할 곳은 광장에 자리한 그들 각각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2. 누구도 증오하지 않는 광장을, - 최은영 <미카엘라>

 

다수의 평론가가 진단하듯, 최은영의 맑고 선한 서사 속에 배치되는 인물들은 무해하고 순하다. 이 순한 서사는 쇼코의 미소의 단편 미카엘라에서도 미카엘라의 엄마라는 여성 화자를 통해 구현된다.

참으로 감사한 시간이었지(224)”라는 발화로부터 짐작 가능하듯, 그녀는 소여된 것들에 감사하는 인물로 제시된다. 더하여 “‘기뻐하세요 자매님 부활절입니다라는 말조차 애도를 가로막는 폭력처럼 느껴졌다.” (238) 라는 대목으로부터 알 수 있듯 4.16의 경험을 제 것처럼 감각하는 감수성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교황의 미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향한 그녀는 찜질방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과 수건과 우유를 주고받는다. “그 때 저도 거기에 있었어요!”라는 대화와 함께 평상에 앉아서 89년 그 빛나던 가을날의 추억을 공유 (232)”한다. 그녀의 지고지순한 성격과 더불어 그날 거기에 있었다.’는 기억으로부터 발생한 우연한 계기는 그녀를 광장으로 향하게 한다. 일면식 없는 노인과 함께. 최은영은 그녀라는 설명이 불필요한 성격의 인물과 우연에 근거한 상황들을 내세움으로써 그녀를 광장으로 이끄는, 바로 그 정동이 어디서 기인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소거한다.

여타의 작품에서처럼 최은영은 감정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순한 인물과 기억이라는 추상에 기대어 서로에게 자연스레 흘러들어오는 감각을 형성한다. 이 매끈한 감정의 유동에는 당위조차도 침입할 수 없다. 이 설명 불가한 정동, 일면식조차 없는 이들로 하여금 손잡고 광장으로 나오게 한다.

그러나 광장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자신을 잊게 할 정도의 무력감이다. 그녀를 부르는 딸에게 누구세요?”(236)라고 응답하는 그녀에게 광장은, 광장의 일원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실감 외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황으로 재현된다. 더하여 그는 내 딸도 거기 있었어요.” “내 딸을 잊지 마세요, 잊음 안돼요” (237)라는 발화로부터 그 정동을 감각하는 것으로부터 당사자- 되기로의 전환을 보이고 있는데, 이로부터 광장 밖에서의 감각은 쉽사리 눈물을 훔치거나 슬픔을 내뱉을 수 있는 타자의 자리였음이 드러난다. 소여된 것에 감사하는 지고지순하고, 눈물을 훔칠 수 있는 무해한 인물은, 광장에 자리하기 이전까지 실상은 무해할 뿐인타자이다. 광장에 나선 이들에게 정동은 그렇게 옮겨 온다. 우연한 계기와 함께, 거대한 무력과 마주해야 하는 설명 불가함을 동반한 채로. 정동은 그러한 설명할 수 없음의 감각 속에 옮겨간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기억과 접합한다. 왜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억해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이 어쩌다 광장으로 나왔을까에 대한 상상은 소거된, 자연화 된 감정의 장이다. 그것은 이 기억과 애도를 짓누르고 덮어버리려는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싸우기 위함이 아니다. 이 슬픔과 무력은 이토록 자연스럽게 삶을 육박해 오는 것이라고, 그 과정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최은영의 문법이 세월호 지긋지긋하다는 언설에게 던지는 것은 그 누구도 증오하고 싶지 않음(238)”이며, “다친 마음을 마음껏 짓밟고도 태연한 이 세상에 그이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원함(241)”이다. 폭력적 언설들, 운동 밖에 선 이들을 이 쪽 건너편으로 끌고 오는 역학은, 설명할 수 없는 감각들이 아로새겨진 광장을 제시하는, 다툼 없는 순한 서사로부터 발생한다.

 

3. ‘엄마가 광장으로 나갈 때 - 김혜진 <딸에 대하여>

 

김혜진은 광장을 외면하던 화자가 어떻게 광장에 나아가게 되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감각하는지에 대해 보다 상세히 조망한다. 김혜진이 조망하는 레즈비언/ 청년/ 강사들이 자리한 광장은 화자인 너는 정말 그것을 원하니?”(144)하는 의 끈질긴 질문 속에서 도달할 수 있다. ‘가 그토록 끈질긴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이유는 가 딸애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는 엄마이기 때문에 딸애를 이해하고만 싶고, 또한 엄마이기 때문에 레즈비언인 자신의 딸을 용서할 수 없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환자인 의 죽음을 지켜보는 에게, 가족이라는 제도로 묶일 수 없는 관계는 무용하다. ‘는 젠에게 홀로 죽어가게 될 딸애와 자신을 투영한다. ‘에게 세상은 쉽사리 뒤바뀌거나 고쳐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고, 그는 안정적인 삶과 홀로되지 않는 죽음을 원한다. 때문에 에게 광장은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 된다. 그러한 는 동성애자 강사 부당해고 시위에서 다쳤다는 딸애의 소식을 듣고 광장으로 뛰쳐나간다. 그녀가 목도한 광장은 상상할 수 없던 폭력과 혐오의 장이다.

 

사람들이 맞은편을 향해 목청을 높인다. 기다렸다는 듯 욕설이 튀어나온다. 순서도 질서도 없는 말들은 공중에서 뒤섞이며 곧장 거대한 소음 덩어리가 된다. 아슬아슬하고 위협적인 감정들이 사람들을 둘러싼다. 다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어떤 감정 속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캄캄한 분노에 휩쓸려 버린 것 같다.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159)

 

상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번쩍거리며 지나간다. 거기에 딸애가 있다. 딸애는 웅크린 채 겁에 질려 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채로 위험천만하게 있다. 적의와 혐오, 멸시와 폭력, 분노와 무자비, 바로 그 한가운데에 있다.

모두의 가장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는 감정들. 바닥까지 내려가면 눈을 번뜩이며 숨어 있는 감정들. 지금 이 순간 눈부신 불빛들이 그런 숨죽인 감정들을 무차별로 깨우고 있는 것만 같다.“ (159)

 

딸애 같은 사람들이 가운데 서 있고 편 가르기 하듯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 반대하는 사람들, 그들을 만류하려고 출동한 경찰과 교직원. 도대체 나는 어디쯤 서 있었던 걸까. 얼마나 서 있었던 걸까. 이 남자가 있던 자리는 어디였을까. 그러나 그런 걸 소리 내어 물을 순 없다.” (160)

 

광장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이에게 그것이 각인 될 때, 그 무자비한 정동들은 타인의 위치는 물론, ‘의 위치마저 혼동시킨다. 동성애자들을 가운데에 두고 찬/반을 하듯 나뉜 사람들은 광장에 선 이들에게 어느 한편에 서기를 요구하지만, 딸을 용서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는 어느 곳에도 위치할 수 없다.

한편, 제시되 듯 찬/ 반의 선택으로 귀결되는 퀴어의 의제들은 사회적 성원권의 문제와도 관계한다. 김혜진이 레즈비언의 성원과 투쟁에 대해 상상할 때, 그것은 생존노후라는 의제를 견인하며, 그 해결책으로서 호출되는 것은 가족이다. 이때의 가족은 생존노후를 책임져야할 기능으로서의 가족을 의미한다.

가족 기능에 대한 사유는 퀴어 담론이 처한 위기로 진단된 바 있다. ‘의 존재가 함의하는, 노후의 부양 주체로서의 가족에 대한 상상력은 기실 사회가 책임져야 할 존재에 대한 책임 전가에 다름 아니며, 가족의 기능성에 대한 상상은 국민 국가주의에 영합하는 정치적 기획에 다름없다.

그러나 퇴행적 말하기를 각오하고, 오늘에 자리한 사람들을 상상한다. 우리는 동성혼도 아닌 동성애가 반대 받던 시간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살고 있다. 그 시간에는 가족이라는 근대 제도의 허상, 그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핍진성을 자각한 이들과 더불어 소설 속 와 같은 이들이 공존한다. 그것은 잔여가 아닌 공존이다. 그 공존의 장에는 가족이라는 기능에 부쳐, ‘희생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전유해왔을 이 시대의 수많은 들이 있다. 광장 밖의 존재는 광장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런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오혜진, 김건형 등이 진단하듯, 김혜진이 호출하는 가족은 분명 퀴어 담론의 적이다. 탈구축의 오늘에 물어져야 할 것은 가족의 기능이 아닌 차별받지 않을권리임으로. 그러나 동시에 김혜진의 문법에 주목해야 할 것은, 김혜진이 그러한 얼굴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광장을 상상할 수 없던 지난한 시간을 살아왔을 중년, 근대 가족제도 속에 많은 것들을 희생해왔을 중년의 여성, 레즈비언 딸과 아이가 자리했을 광장을 상상하고 달려 나가야만 했던, 오늘 날, 광장의, 중년의, 여성.

콤마의 연속 속에 구체화되는 의 얼굴과, 그가 광장으로 나가기까지의 첩첩이 쌓인 시간들은, 광장 밖에 선 사람들에 대한 상상이자, 그들을 끌어오기 위한 힘이다.

 

 

4. ‘지금은 우리가 우리여야만 하는 광장 - 황정은 < 아무 것도 말 할 필요가 없다 >

 

최은영이 <미카엘라>를 통해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광장을, 김혜진이 <딸에 대하여>를 통해 딸애와 같은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사람들이 찬/반으로 나뉜특수한 개별의 광장을 그려낸다면, 황정은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통해 구현하는 광장은 몇 번이고 반복되는현장 속의 광장이다.

 

서수경과 나는 1996년의 고립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각자가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를 말이다. 그 고립의 기억은 잊혀지지는 않고 다만 묻혀있다가 2008610 일 광화문 대로에 명박산성이 등장했을 때와 2009120일 용산에서 남일당 건물이 불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구체적으로 환기되었다” (187)

 

김소영과 서수경에게 96년도의 연세대 사건과, 명박산성과 용산 참사, 나아가 광화문의 시위는 한 줄기로 엮여있다. 그들이 (187)과 같이 회상하듯, 연세대 사건이 가지고 온 폭력 운동에 대한 반감은 광화문의 비폭력 시위를 만들었다. 또한 연세대 사건에서 정부가 집단을 나누고 격리시키는 방식은, 광화문 광장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된다.

보지는 어떻게 씻었냐”(173), 연세대 사건의 폭력적 언설을 몸에 새긴 신체들은, 격리와 폭력의 시간을 기억하고, 그것을 과거에, 또한 미래에 일어난 () 또 다른 사건과 접합시킨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매개가 되는 것은 현장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상흔, 그 트라우마다. 그들에게 광장은 유사한, 그러나 다른 발화점을 기준으로 몇 번이고 반복된다.

또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그리하여 그들이 마주하게 된 광장의 모습인데, 이때의 광장은 우리가 꼭 우리일 수는 없다는 감각 속에 온다. 김소영과 서수경이 2016년의 광장에서 마주한 것은 out’이라 쓰인 팻말을 들고 선 남성이다(304). 붉은 색의 라는 글자 앞에 김소영은 불쾌를 느낀다. 그 글자가 청와대 한켠에 숨은 대통령이 아닌, 자신과 같이 광장으로 나온, 무수한 여성을 향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소영이 그 불쾌를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말하지 않음은, “지금은 우리가 우리’”이기 때문이다.(306)

광장이라는 장소의 집적성이 은폐하고 있는 것은, 그 속에 자리한 무한한 권력의 위계들이다. 그 내부에 자리하는 권력의 미분적 차별화는, 때때로 우리하나로 만드는 데에 재고를 걸며, 광장의 일원일 수 없는 청년들을 광장 근처의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황정은은 체현하지 못한 과거의 시간과, 발 딛고 선 오늘의 길항을 매개하고, 광장에 자리한 하나일 수 없는수 많은 다른 얼굴들과 그들에 자리하는 권력의 위계들을 노출한다. 인식, 공감 불가능한 영역 속의 운동들은 그러한 매커니즘을 통해 오늘과 맞닿으며, 운동의 면면에 자리할 수많은 주체들은, 그렇게 가시화 된다. 어떤 독자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시간과 존재들은 그렇게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5. 나가며

체현할 수 없는 시간들, 감각할 수 없는 정동들, 그것을 옮겨 내는 것이 소설로서 가능하다면, 소설은 그것을 읽는 이의 삶에 얼마만큼 육박해 들어갈 수 있을까. 적어도 소설을 운동의 장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인 것 같다.

오늘의 문학은 억압하지 않음의 낡은 테제를 뒤엎고 문학은 억압한다는 새로운 상상력 위에 온다. 문학이 그처럼 삶을 육박해 들어오는 억압의 장치라면, 그것은 현장의 정동기억에 거리 둔, 운동의 장 밖에 선 이들을 끌어올 수 있는 힘이 있다.

사르트르는 작가의 기능이란 그가 예술적으로 의미화하고 형상화하여 현실을 향해 투기(投企, Projektion)한 대상을 아무도 모른 척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우리는 얼굴을 상상해야 한다. 광장의 면면에 자리한 구체적인 얼굴들의 상상은 그것을 못 본 척 할 수 없게 한다. 현재로서 내게 소설을, 그 서사 양식이 갖는 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런 함의를 지닌다. 구체적인 얼굴들로부터 눈 돌릴 수 없는 충격, 그것에 눈뜨고 마주해야 한다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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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예원(국문 17)
전예원(국문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