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한갓 바이러스가 일상을 흐트러뜨렸다. 사람들 사이의 인연이 끊어지고, 어떤 풍경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딘가 비거나 망가진 듯한 느낌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막상 달라지고 나니 그런대로 익숙해지기도 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야 글렀고,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더 걸릴지 모른다. 강의실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고, 대학이라는 것의 존재 방식마저 바뀌고 있다. 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벌어지고야 말 일이기는 했다. 학문의 위기라는 말은 식상하기 짝이 없으며, 온라인도 국제화도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흐름 아닌
가? 비용이 덜 든다며 내심 반기는 축도 적지 않을 터다. 혁신이니 뉴노멀이니 하는 멋진 포장이 곁들어졌을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무엇인가? 혼자 가르치고 혼자 배운다는 것. 그게 전부다.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정서적 교감이나 친밀성은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이제 교수가 말하지 않은 지식, 학생이 듣지 않은 정보는 의미가 없다. 교수는 학생에게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학생은 동료들과 생각을 나눌 필요가 없다. 그나마 랜선과 와이파이가 끊기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한마디로 교실이 고립되었다.

사각형 모니터 안, 매끄러운 액정 화면 위를 떠도는 말과 이야기에는 새로운 상상력이 깃들지 않는다. 단지 전달력이나 학습 역량 탓이 아니다. 독학이나 훈련에는 효과 만점일지 몰라도 엉뚱한 질문, 황당한 생각이 뛰놀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과 부딪치는 자극과 도발이 없다면, 나와 다른 세상을 만나지 못한다면 더 이상 강의실이 아니고 대학이 아니다.

대학은 낡고 오래된 것을 가르치고 배운다. 지금 당장 쓸모 있고 가치 있는 것을 가르치고 배워서는 안 된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꾸고, 미처 오지 않은 미래를 희망해야 한다. 원리와 근원에 대한 끈질긴 탐구를 통해 생생한 사회적 실천의 동력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오직 상상력을 통해서만 실험과 도전이 가능하다. 대학이라는 곳이 특별한 이유다.

교실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던 질문과 대화, 소소한 의심과 갈등이 무척 그립다. 어느 날 윤동주 시를 읽다가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더랬다. 과연 윤동주는 자기가 쓴 시를 서울말로 읊었을까? 윤동주는 중국 땅에서 태어나 자랐다. 윤동주는 한국 시인인가? 윤동주는 일본 감옥에서 창씨개명 한 이름으로 죽었다.

그날 우리는 식민지 시인의 아름다운 노래에서 출발해 국적이 어떤 의미인지, 국가와 민족이란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누구나 주민등록번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에 놀랐다. 성씨나 성별을 바꾸면 어떤 곳에 들어갈 수 없는지 따져 보았다. 또 다른 물음이 고개를 들었다. 수천만 년 한자리를 지켰던 땅과 산과 강에 언제부터 주인이 생겼나? 부모가 17층에 사 둔 아파트는 마땅히 내 것인가? 시끌벅적한 토론 끝에 우리 모두 배가 고파졌다. 비싼 등록금 내면서 공부하는데 왜 대학에서 점심을 안 주는지 성토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복사비와 교재와 기숙사까지 제공되어야 옳다고 결론 내렸다.

윤동주는 식민지 밤하늘의 별을 헤아렸지만 우리는 강의실에서 사뭇 다른 삶의 모습을 설계할 수 있었다. 나의 존재가 자유롭고, 타인과 평등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민주적인 관계로 맺어지는 상상.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연습이 필요하며, 나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 곳이 대학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인터넷에서 이러한 장면을 기대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벌써 1년 넘게 다른 목소리에 맞닥뜨리지 못했고, 새로운 질문과 씨름하지 않았다.상상력이 멈추면 아무도 성장할 수 없음을 실감하고 있다. 고집스레 보일지라도 우리가 다시 강의실에서 만나야만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온라인 너머,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이후를 상상하기 위해서.

 

 

일러스트ㅣ김지우 기자 web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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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교수국어국문학과
박진영 교수
국어국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