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여준 기자 (yjyj0120@skkuw.com)

본고에서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책을 다루기로 다짐했을 때 한 지인은 “꼭 그런 고리타분한 시의성에 얽매여야 하겠냐”고 말했다. 대다수 독자는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그 지인만큼 냉소적이지는 않을 테다. 그렇다고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심 가져야 마땅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이도 얼마 없으리라 생각한다. 당장 이 칼럼에서 관련 문제를 다루는 필자조차 그렇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왜?』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재건팀, 외교부 아중동국장을 지낸 저자가 풍부한 역사 지식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고대부터 21세기까지의 유구한 역사를 풍부한 네러티브로 풀어내 독자를 사로잡는다. 최근 탈레반 집권 사태가 벌어진 배경을 뿌리부터 이해하는 데는 이 책이 적격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왜 이해해야 하는지 의심해볼 수 있다. 지인은 깊이 있는 철학책을 권했다. 혹자는 자기 생활 속 문제에 눈을 돌린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 삼아 이 책을 그들에게 권할 수 있을까. 이토록 먼 나라 이야기를, 관심 가져도 변치 않는 비극을.

이 질문에 답하고자 앎이 왜 소중한지 먼저 물어보고 싶다. 우리에게는 왜 앎이 필요할까? 단지 진리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서라는 답도 있다. 그러나 모든 앎이 단지 그 자체를 위해서일 뿐이라면, 인간은 앎으로부터 지적 허영과 기쁨 외에는 아무런 효용도 누릴 수 없을 테다. 앎의 가치가 그뿐이라면 탐구는 공허한 일이다. 탐구는 쉽사리 효용이 있는 일의 뒷전으로 밀릴 것이다.


인간이다. 맥스웰 방정식에 관한 앎은 인류의 편의를 증진하는 효용이 있다. 실체적 진실에 관한 앎은 누가 범인이고,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가리는 효용이 있다. 역사에 관한 앎은 행위와 결과를 조망해 좀 더 적절한 행동의 원칙(어쩌면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는 효용이 있다. 그 효용을 누리는 주체는 다름 아니라 인간이다.

매일 지구 저편에서 전파를 타고 가슴을 에는 사진과 영상이 날아온다. 남의 고통에도 아파하는 연민으로 지지와 연대를 표명하는 시민들은 아름답다. 그러나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프가니스탄 역사를 공부한다기에는, 우리의 앎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효용이 없다. 패권과 자국우선주의는 우리의 앎과 평화를 향한 열망과는 상관없이 작동한다. 글을 쓰는 사람의 가슴도 미어지지만 이는 현실이다. 그래서 서두에 등장한 지인처럼 냉소를 보이는 사람도 있을 테다.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어린이는 냉소주의자들에게 이 책을 권할 때 들 적절한 이유가 아니다.

아프간 어린이를 위할 길은 없지만, 어린이의 눈물에서 눈을 떼지 않아야 한다. 그 눈물이 어디에서 흘러나온 피인지, 그 상처를 낸 칼이 무엇인지를 지켜보자. 단지 악의 표상인 이슬람 근본주의가 문제인지, 지정학적·인류학적 이해가 결여한 개전으로 인한 폐해가 문제인지, 공부해서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인과가 아프가니스탄 땅 위 저주의 고리를 이루고 있는지 윤곽을 그려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눈물 흘리지 않으려면, 아울러 우리가 같은 상처를 내지 않으려면 알아야 한다. 아프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지켜보고, 공부하자. 짧은 글로 그 취지가 전달됐다면, 앎을 위한 첫걸음으로 이 책을 권한다.

 

황여준 부편집장 yjyj0120@skkuw.com
황여준 부편집장
yjyj0120@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