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가볼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사랑, 겪어보지 않은 것들에 관한 애정. 그런 삶과 사랑의 원천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지닌 예술을 보면서 나는 그런 질문을 했다. 이야기 속의 모든 것들이 현실도 사실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예를 들면 나는 무진이 그립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으며 눅진한 안개가 서린 그곳을, 윤희중이 걸었던 길을, 고향을 맞이하며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그 상황이 보고 싶었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읽으며 모두가 사라짐의 길을 걸었던 삼포를, 모두가 개인이었다가 하나로 바뀌었던 그 여정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서 내가 찾았던 것은 결국 모두의 상실이었다. 사실 그 무엇도 실존하는 것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작품 속의 인물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삼스럽지만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깨달음 뒤에도 그 안에서 숨 쉬는 이들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나는 그들을 속절없이 사랑했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를 읽으면서는 등장인물인 화수에 깊이 이입했다. 소설 속에서 화수는 회사의 거래처 직원한테서 염산테러를 당하고, 그로 인해 뱃속의 아이를 잃는다. 자신의 돌아가신 할머니를 깨워 ‘어떻게 가슴이 터져 죽지 않고 웃으면서 일흔아홉까지 살 수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던 화수, 다른 이들에게는 결코 멀지 않은 도서관이 지나치게 멀게 느껴졌던 화수. 나는 그런 화수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임을 알면서도 그녀의 하루가 안온하기를 기도했다.

 그러면서 이 현실의 피해자들의 하루가 따뜻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길거리의 낯선 이들이 들고 가는 갈색 병이 염산 테러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호흡을 다잡아야 했던 화수를 떠올렸다. 무수히 무너졌고 다시 일어서야만 했던 그 사람들을, 스스로를 끝없이 다잡아야만 했던 모든 상황들을 응원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애정, 그것들에 대한 사랑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와 맞닿아 있었다. 이야기를 읽어낸다는 건 인물들을 그들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같기도 했다.

 내가 이야기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상황들이 결국 세부적으로는 나를 만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나는 모든 이야기들은 당연히 가상이다. 그 가상의 세계에서 만난 모든 상황과 사람들은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그들이 행복해지는 과정, 분노하는 이유, 끝내는 울어버리는 그 모든 것들이 모조리 언젠가 내가 마주했던 현실이다. 가상이기에 마음 놓고 몰입하다가 끝내 마주해버리는 현실의 본연의 모습이 그들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구나, 화낼 수밖에 없었구나, 울 수밖에 없었구나. 이해는 공감이 되었고 공감은 일체가 되었다. 이야기는 내게 타인이 지인이 되는 순간을 알려주었다. 맥락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곧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박찬주(국문 21)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