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 강제출국대상 이주노동자들 철야농성 현장을 가다

기자명 이경미 기자 (icechoux@skku.edu)

지난 20일 오후 8시. 어둠이 내려앉은 명동성당 입구 아래 유난히 피부가 검은 사람들 80여명이 모여 앉아있었다. “끝까지 투쟁해서 노동비자 쟁취하자!”,“노동비자 쟁취해서 공장으로 돌아가자!” 어눌한 한국말이지만 지치지 않고 승리와 투쟁을 외치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6일째 철야농성에 돌입한 이주노동자들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한 달 밥 사서 방안에 숨어있었어요. 문 밖에 발소리만 나도 겁먹었습니다. 소금 사러 간 동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집회 앞에서 연설하는 한 이주노동자는 그들의 현실을 진솔하게 들려주고 있었다.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 온지 4년이 넘어 고용허가제로 인한 강제 출국 압력을 받고있는 사람들이다. 평등노조 이주지부에서 온 김안기씨는 “이들은 이미 해고된 사람들이라 경제적 뒷받침 없이 농성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밝혔다. 한겨울 날씨에도 가을 잠바를 걸치고 발전기로 네 개의 천막에 전기를 자체 공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한국보다 추운 곳에서 온 사람이 없어요. 동상에 걸려도 동상인 줄을 모르니…”둘, 셋씩 모인 활동가들의 표정이 굳어있는 것이 뚝 떨어진 기온 탓만은 아닌 듯 했다.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한국

우리나라에 이주노동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중소·영세 기업을 필두로 임금이 낮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자, 정부는 산업연수생 제도를 실시해 우리의 기술을 전수한다는 명목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이들이 머물 수 있는 기한은 2년. 그러나 ‘한국에서 받는 돈이 아무리 적어도 그들의 조국에서 버는 것 보다 이익’이라는 현실과, 한국 기업의 저임금·고효율 정책이 부합하면서 이 제도는 많은 불법체류자를 양산했다. 불법체류자들은 신분상의 약점으로 인해 열악한 노동환경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수해야만 한다.“손이 아파서 사장에게 갔더니 망치로 손등을 때렸어요. 병원에도 못 가고, 마음 아팠어요”말레이시아에서 온 하십씨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고용허가제는 허가받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경우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으나, 합법적인 체류기간은 2년에서 5년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5년이 지나면 여전히 이들은 불법체류자이며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을 수 없다. 출국 1년 후 재입국을 시켜준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브로커를 통해야 하는 등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들의 모습은 30년 전 독일에서 일하던 우리 노동자들과 꼭 닮았다. 후진국 한국에서 온 노동자들이 노동비자와 노동3권 쟁취를 위해 농성을 벌였다. 결국 독일은 고용허가제를 철폐하고 노동비자제도를 실시했다. 하십씨는 “지금도 일본에는 2만여명의 한국인들이 불법체류자로 우리 처럼 노동착취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 평등노조 이주 노동자 지부는 명동성당에서 열흘때 철야농성중이다. 황건강기자

농성 일주일째 아침

농성단 대표인 네팔인 서머르칸트씨의 도움으로 여성 활동가들이 묵고있다는 사무실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남자들은 천막에서 자고 여자들은 천주교 인권연대 사무실을 밤 동안 빌려 사용 중이었다. 감기에 걸린 여성 외국인 노동자가 고통을 호소했으나 어떤 난방장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사무실 한켠에서는 새벽 3시까지 회의가 진행됐고, 기자가 눈을 뜬 시각은 아침 7시 30분이었다. 아침집회에 늦었다는 말에 채 씻지도 못하고 침낭을 정리해 나왔다. “노동비자 쟁취하고 인간답게 살아보자!”이미 집회는 시작됐다. 노동비자제도가 도입되면 이들은 기간 제한 없이 한국에서 일할 수 있고 직장을 옮길 수도 있다.

“우선 정부차원에서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겠지요. 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각자의 조국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집회현장 앞을 지나던 시민의 말이다. 우유와 빵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또 다시 시린 하루를 보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들을 둘러싼 은행과 금융사들의 벽이 어느 때보다 높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