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시공간적 제약 뛰어넘어 활약하는 디지털 휴먼
인공지능 기술 통해 더욱 사람 같은 존재로 거듭나
악용 방지를 위한 사회적 논의 필요해
사람과 같은 외모로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지만, 가상 세계에만 존재해 직접 만질 수 없는 존재가 있다. 우리는 이들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디지털 휴먼 김래아(23세) 씨는 지난해 2월 한국경제와의 가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온라인상에서 저는 여러분들과 소통하고 이야기할 수 있고 의견을 말할 수 있어요. 온라인 공간 속에서 저는 여러분과 차이가 없을 거예요.” 디지털 휴먼은 이미 가상과 실제를 넘나들며 우리 삶 속 다양한 분야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디지털로 만들어낸 나의 쌍둥이
2020년 12월, 엠넷 MAMA 무대에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3D 그래픽으로 등장했다. 어깨 부상으로 무대에 함께할 수 없었던 슈가는 가상으로나마 다른 멤버들과 함께 무대에 섰고 이에 팬들은 ‘감동적인 연출이었다’는 등의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사람의 외형과 행동을 모방해 디지털로 만든 3D 그래픽 인간을 디지털 휴먼이라고 한다. 디지털 휴먼은 앞선 슈가의 사례처럼 실제 사람을 디지털로 옮겨 놓은 디지털 트윈과 아예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낸 가상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 최근엔 배우나 가수 등 유명인을 복제해 디지털 트윈으로 제작하기도 한다. SK텔레콤은 2020년 11월 리그오브레전드 e스포츠팀 T1 소속 프로게이머 페이커의 디지털 트윈인 디지털 페이커를 제작했다. 광고나 외부 행사 등을 디지털 페이커가 소화하며 팬들과 소통하고 실제 페이커는 본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실제 사람이 지닌 시공간적 제약을 포함한 여러 가지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트윈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내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
실존 인물을 디지털로 옮기는 것이 아닌 새로운 인물을 구현해낸 디지털 휴먼도 있다. 버추얼 유튜버(이하 버튜버)도 그중 하나다. 버튜버란 가상의 캐릭터를 외형으로 쓰며 활동하는 유튜버다. 지난해 전 세계 유튜브 채널 *슈퍼챗 수익의 상위 9개 채널이 모두 버튜버일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버튜버의 인기 요인 중 하나는 가상 캐릭터의 컨셉과 세계관에 충실히 임해 시청자가 강한 몰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평소 버튜버의 방송을 즐겨보는 대학생 문정빈(22) 씨는 “버튜버는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고 가지각색의 컨셉을 보여줄 수 있어 일반적인 방송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재미를 준다”고 말했다.
버튜버는 자신의 실제 외모나 신분을 노출할 필요 없이 매력적이고 독특한 캐릭터로 대중에 어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버튜버 ‘루이’는 인공지능으로 만든 가상의 얼굴을 *딥페이크 기술로 합성해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루이커버리’에서 “외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즐겁게 음악을 해보고자 버튜버 가수로 활동하게 됐다”고 밝혔다.
진짜 사람 아니었어? 나보다 인싸인 버추얼 인플루언서
신한라이프 TV 광고 속,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춤추고 있는 여자가 있다. 실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로지’라는 이름의 가상 인간이다. 최근 광고를 비롯한 미디어에서 활약하는 가상 인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들은 버추얼 인플루언서라고 불린다.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개인 방송인을 위한 대체용 캐릭터로 쓰이는 버튜버와 달리 독립된 존재로 활동한다.
장기간에 걸친 연구와 투자를 통해 제작된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현실성을 무기로 한다. 대부분의 버추얼 인플루언서들은 언뜻 봤을 땐 실제 사람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외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만의 개성적인 성격과 취향, 일상을 SNS에 공개하며 팬들과 소통하기도 한다. 300만 명 이상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소유한 인기 버추얼 인플루언서 ‘릴 미켈라’ 또한 LA에 거주 중인 19세 브라질계 미국인이고 직업은 팝가수며 취미는 스케이트보드 타기라는 상세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단순 SNS 스타에 그치지 않는다. AI 기술로 독자적인 음색을 만들어 음원을 내거나 작품에 배우로서 출연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엔터테이너로 활동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지난달 25일, 로지와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가 함께하는 ‘오로지구 챌린지’가 시작됐다. 로지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폐현수막 재활용 키링 제작 키트를 홍보하며 환경 오염으로 침해되는 아동 권리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했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메타버스팀 한상열 선임연구원은 “인간은 자신과 유사한 인간에게 편안함을 느낀다”며 “최근의 디지털 휴먼은 인권 문제, 환경 문제 같은 사회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내거나 데이트를 하고 실연의 아픔을 겪는 모습을 공유하는 등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호감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언제든 일하는, 언제나 완벽한
버추얼 인플루언서만의 장점은 무엇일까. 디지털 휴먼 제작 기업 ‘5motion’을 운영 중인 광운대 전자재료공학과 서영호 교수는 “디지털 트윈의 경우 대상이 되는 실제 사람이나 그의 소속사에 저작권이 있지만,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디지털 휴먼을 만들면 늙지 않는 완벽한 외모의 소속 연예인을 보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업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블룸버그에 따르면 2020년 인플루언서 시장 규모 7조 6000억 원 중 2조 4000억 원이 가상 인간의 수익이었으며 2025년에는 가상 인간이 실제 인간 인플루언서의 시장 규모를 뛰어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 선임연구원 역시 “24시간 활동할 수 있으며 사생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활용 목적에 따라 맞춤형으로 제작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고 전했다.
더욱 인간적인 디지털 휴먼이 온다
디지털 휴먼은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더욱더 진화하고 있다. 서 교수는 “아직은 디지털 휴먼이 표정을 짓고 말하는 기술이 수동으로 이뤄지는 초보적 단계에 있다”며 “추후 디지털 휴먼이 인공지능 기술과 결합해 자동으로 대화하고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낼 수 있다면 용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 말했다.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을 활용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학습 역시 기대되는 바다. 한 선임연구원 또한 “SNS를 통한 소통 외에도 대화형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네트워크를 통한 실시간 음성 대화가 가능해지고 있다”며 디지털 휴먼의 발전을 예고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 외에도 비서, 교사 등 다양한 직종에서 디지털 휴먼이 활약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 선임연구원은 “△고객 응대 △교육 △방송 △상담 등 디지털 휴먼 활용 분야는 계속 늘어갈 것”이라며 “고객 응대 분야에서는 이미 24시간 고객 응대가 가능한 디지털 휴먼 도입이 이뤄지고 있으며 AI를 활용한 가상 앵커나 가상 교사도 상용화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했다.
새로운 인류를 맞이할 준비 됐을까
한편 디지털 휴먼의 사실성이 높아지면서 실제 인간과 디지털 휴먼 간의 혼란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현재 디지털 휴먼 사업은 초기 시장으로, 아직은 관련 사회적 논의가 부족한 실정이다. 한 선임연구원은 “디지털 휴먼의 부정적 사용을 막기 위해 사회적 합의와 정부의 적절한 대응, 기업들의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며 “동의 없이 타인의 형상으로 디지털 휴먼을 만들지 않고 사용 과정에서 습득된 데이터와 사생활 정보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등 디지털 휴먼 산업이 신뢰성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전했다.
◇슈퍼챗=유튜버가 실시간 방송 중 시청자로부터 후원금을 받는 시스템.
◇딥페이크=특정 인물의 얼굴을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영상에 합성하는 기술 또는 영상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