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은미 기자 (qewret16@naver.com)

인사캠 만남 - 김형희(무용 89) 동문

사진 김은미 기자 qewret16@

 

“파란만장. 내 삶은 파란만장했죠.”
김형희(무용 89) 동문은 삶을 한마디로 정의해 달라는 질문에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동숭동 이음센터 4층에 위치한 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실, 푸른 식물들로 가득한 따스한 공간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무대에서의 꿈을 캔버스 위에 펼치다
미술·공연기획·임상미술치료까지
끝없이 도전을 이어가

 

어린 시절, 예술과 사랑에 빠진 소녀

“할 때는 하고 놀 때는 신나게 노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 동문은 친구들을 이끌고 동네 골목에서 여러 놀이를 했다며 활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한 번은 달고나를 만들겠다며 국자를 태운 적도 있었죠.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어요.” 도전을 좋아했던 소녀는 공부도 곧잘 했으나 예체능에 더 큰 흥미를 느꼈다. 김 동문은 피아노, 미술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던 중 무용과 사랑에 빠졌다. “다른 건 하면서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무용은 하고 나서 오는 시원하고 보람찬 느낌을 좋아했어요.” 그렇게 무용수의 길을 걷게 된 김 동문은 계원예고에 진학했고, 대학 역시 무용 전공으로 지원하게 됐다. “마침 그때 성균관대가 무용과 1기를 모집했어요. 졸업 후에 교수가 돼야겠다는 포부를 안고 지원하게 됐죠. 전통 있는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어 자랑스러웠고,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해요.”

대학에서 삶의 전환점을 맞다

김 동문의 재학 당시 학교의 모습은 현재와 사뭇 달랐다. “무용과가 처음 생겼으니까 다른 학우들도 새로웠나 봐요. 워낙 남학우가 많았고 여학생이 적었으니 이슈였죠. 점심시간에 금잔디 광장에서 바람 쐬고 있으면 다 무용과를 보러 나오고 그랬어요.” 또한 그는 “지금은 금잔디 광장이 굉장히 깔끔해졌더라고요. 그때는 시위도 잦았고, 많이 다른 모습이었어요.”라며 과거의 캠퍼스를 회고했다.

대학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느 시기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김 동문은 스무살이라 답하며 “근심 없이 놀고 원하는 것을 다 도전해볼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라 부연했다. “화장하고, 미팅도 나가고, 선배들과 뒤풀이도 가고. 노는 게 그저 즐거웠어요. 그러다가 1학년 2학기부터는 무용을 좀 더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어 소개를 통해 현대무용단에 들어가게 됐죠.” 마로니에 공원 뒤쪽에 있던 연습실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연습한 끝에 공연에도 여러 번 올랐다. 무용단 활동에 집중하며 학교 활동은 줄었으나, 새로운 활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아는 언니가 모델 출신이어서 모델 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체조반 동아리 활동도 참가했죠. 3학년 때는 외부 학교 학생들과 같이 제주도로 MT를 가기도 했어요. 다 새로운 경험이었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그러나 변화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김 동문은 4학년 봄날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장애를 갖게 됐다. 많은 것이 변했고 고통의 시간은 이어졌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사고가 꿈이었길 바랐고, 변해가는 게 두려웠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부모님께 나는 어여쁜 막내딸이었고, 살아난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어요. 딸은 죽을 생각만 하는데, 딸을 위해 머리를 조아리는 부모님이 눈에 밟혔죠.” 김 동문은 죽지 못할 거면 한 번 더 열심히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고 본격적으로 열심히 재활에 참여했다. 김 동문은 재활의 일환으로 미술을 만났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미술을 한 적이 없어요. 미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었죠.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 팔 힘도 생기고 재활 치료 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미술을 시작하게 된 김 동문은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을 이었다.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됐어요. 팔도 조금씩 달라지는 게 보이고, 처음에는 10분 그리고 쉬었는데 점차 시간을 늘려 2시간, 3시간씩 그려서 작품이 나오면 뿌듯했죠. 캔버스에 무용수를 그렸어요. 그림 속에서 무용수를 춤추게 하며 스스로 힐링이 되고, 그렇게 몇 년을 쭉 하게 됐네요.”

멀티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살아가다

김 동문은 자신을 멀티 아티스트라 소개했다. “모든 예술은 하나라고 생각해요. 멀티 아티스트라고 말하는 이유죠. 하나의 영감이 떠올랐을 때 그림, 음악, 공연 어떤 장르로 표현하는지의 차이지 그 영감은 하나거든요. 미술을 할지, 공연을 할지, 강연을 할지에 따라 필요 요소를 투입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거예요.” 그는 화가로서, 임상미술치료사로서, 공연 기획자로서, 강연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이어왔다.

재활로 시작하게 된 미술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7년째에 슬럼프가 온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소통할 곳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개인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목표를 설정하고 열심히 준비했죠.” 그렇게 첫 개인전 ‘움직임의 자유 찾기’는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시작점이자 과거와의 연결점이었다. “사고 전에는 지인도 많았고 활발히 지냈는데 10년 이상 보지 못하니 다 멀어졌어요.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죠.” 전시회를 통해 소중한 인연들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얻게 된 김 동문은 미술을 “나의 어떤 걸 보여주는 세상으로의 소통의 길”이라 말하며 웃었다. “미술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고, 함께하는 동반자예요. 옛날에는 무용을 했지만, 지금은 그림 안에서 춤을 춰요.”

그림으로 세상을 만나던 때, 한국에서는 임상미술치료에 대해 막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임상미술치료에 관심을 가져 1급 자격증까지 취득한 그는 차의과대 통합의학대학원에 진학해 4학기 만에 조기 졸업했다. 대학원에서 세계 최초로 척수 손상 환자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졸업 후 임상미술치료사로서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그는 “지치고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하고 작은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전했다. 김 동문은 그리는 과정을 통해 힘듦을 토해낼 수 있는 점이 임상미술치료의 큰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예술만이 가진 치유의 힘이 있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순수성을 알게 해주죠.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점에 사명감을 갖고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대에서 캔버스로, 다시 무대 위로

김 동문은 새로운 도전을 이어갔다. 그는 공연 기획자로서도 장애인 예술에 관해 다양한 목소리를 냈다. 방송 아카데미 작가 반을 다니며 어깨너머로 보고 익힌 기획서 작성 방법을 바탕으로 음악극, 실험극 등 여러 공연을 기획했다. “최종적으로 뮤지컬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무대에 턱이 없고 의자도 다 들어가는 블랙박스 공연장을 보고 창작뮤지컬 ‘비상’을 구상하게 됐죠.” 그렇게 장애 예술인들 삶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깊은 감동을 안겨주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공연을 통해 얻은 가치를 묻자 김 동문은 “사람”이라 답했다. “공연을 통해 인복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참여하신 분들이 양질의 공연을 위해 함께 달려왔기에 얻은 성과라 생각해요.” 김 동문은 또한 강연자로서도 무대에 오른다. 그의 강연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강연을 통해비장애인 분들께는 ‘저렇게 잘 살고 계시고, 희망을 놓지 않으시는구나’하고 느끼면서 자기 삶을 더 열심히 살아봐야겠다는 동기를 부여하고 싶어요. 장애인 분들께는 강연을 통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미술 치료를 통해 도움이 되고자 해요.”

장애와 비장애의 허물어진 경계를 꿈꾸다

“공연을 기획하고,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을 하면서 이 경험을 다른 장애인들과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 없이 모두가 함께하는 예술을 꿈꿨죠.” 장애 예술인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를 꾸리고 싶던 그는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 대표로 역임하게 됐다. 김 동문은 “장애는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일 수 있으나 예술에서는 오히려 하나의 오브제”라고 부연했다. “비장애인들이느낄 수 없는 결핍이 오히려 창작의 세계가 되기 때문이죠. 예술 장르로 장애 예술이란 것을 만들어내고자 해서 단체를 만들고 그 길을 함께 걷고 있어요.”

그는 지난해 12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으로서 공식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올해는 예술에 대한 개념과 시스템을 정립하고 장애 예술인의 성장 과정에 대해 연구해 다방면으로 지원하고 싶어요. 장애는 사회적 환경 때문에 생기는 거죠. 제도나 다양한 지원이 충분히 이뤄지면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은 흐릿해져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그런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요.” 앞으로 더 꿈꾸는 것이 있냐는 물음에 김 동문은 “누구나 평범해지는 사회”를 꼽았다. “영화관에서 청각장애인이라 하면 자막이 뜨는 안경을 바로 제공하는 등 누구나 장애에 대해 자연스럽게 지원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꿔요. 저 사람은 특별한 게 아니라 그런 기술이나 지원을 이용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바라요.”

지금의 자신을 귀하게 여겨요

김 동문은 후배들에게 현재의 경험을 소중히 하라고 말을 꺼냈다. “내 환경에서 소소한 일들도 흘러가게 두지 말고 조금씩 경험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논다는 것도 경험이에요. 경험을 잘 가지고 있으면 사회에서 필요할 때마다 쓸 수 있어요. 그때그때 하고자 하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깊게 생각하고, 삶에 대해 고민하면 좋겠어요.” 또한 김 동문은 목표를 이루는 법으로 “마인드 컨트롤이 효과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면서 웃었다. “제가 4년 전부터 노트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이 되고 싶다고 써놨더라고요. 그렇게 적어두면 생각하게 되고, 당장은 이뤄지지 않을지 몰라도 나도 모르는 새에 노력하게 돼요. 목표를 기록하고 할 일을 체계적으로 세우는 것, 그런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청년들을 향해 김 동문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정성어린 한 마디를 건넸다. “지금, 현재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가장 존중하고, 자기 모습을 예뻐하고, 귀하게 여기면 좋겠어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