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Y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함께할 공모전 이야기도 나누고, 방학 때 유럽이나 태국 여행을 가자고 대화했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Y가 현재의 것들에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고 있음을 보았다. 반면 나는 Y에게 지금 하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Y는 그런 내가 번-아웃을 겪고있다고 말했다.

나는 왜 현재에 행복을 느끼지 못할까. 사실 내가 쫓는 곳에는 행복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를 드러내는 말에는 진심이 아닌 알량한 자존심만 담겨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흔히 여기는 ‘멋진 생각’을 갖기 위해 발버둥 치고, 그것의 귀퉁이를 겨우 얻은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그 귀퉁이에 내 행복이 있을까, 의문이다.

내가 평소에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은 가족과 도란도란 모여 하루의 이야기를 나눌 때, 서로 따뜻한 눈빛을 주고받을 때, 사랑하는 친구들과 새벽 통화를 할 때, 좋아하는 OST BGM을 들을 때, 무언가에 몰두할 때, 푸른 바람을 쐬며 멍을 때릴 때이다. 전공과 직책, 사회적 관계로 정의되지 않고, 그냥 나로서 온전하고 정의될 때 행복하다. 그때 간질간질한 떨림이 온몸을 훑는다. 나는 자연스러움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행복의 원천은 나 자신이었다. 과거의 나는 일상 속 행복을 무시한 채, 눈에 보이지 않고 현실에 없는 미래를 붙잡아 그 모양을 살피 려 손을 휘젓다가, 그 손짓이 행복보다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을지 모른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는 말은 당연히 내게도 해당했다. 오늘도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재미없을 것이라고 예단했지만, 막상 가보니 재미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속성을 알면서도 미래를 확정하려 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오만하다. 지금껏 오만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 무언가를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무언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괴롭게 여겼다. 인생에 있어 모르는 것 투성이면서 다 아는 것처럼 구는 것은, 지금까지 스스로 부끄럽게 여 기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일까.

힘들다고 생각한 시기를 되돌아보면, 나의 초점은 과거의 좋았던 모습에 가 있다. 과거엔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의 나는 왜 이러지. 연속된 자책은 또 다른 마음의 구멍을 파고들었다. 오만함의 연속은 나를 태웠다. 태워서, 재로 만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번아웃이라고 명명했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번아웃을 초래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런 식의 욕심은 잘 해낼 수 있는 나를 오히려 태우기에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다고 느낀다.

과거는 과거대로, 그때의 내가 세상을 바라봤던 과점 그대로 두자. 현재의 나는 현재의 나대로 지금을 느끼고 바라보고 대화하자. 미래는 현재의 나로부터 비롯되니, 크게 걱정하지 말고 현재의 나를 소중히 가꾸고 느끼자.

그것이 오늘 Y와의 통화를 통해 느낀 바이다.
 

하은서(교육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