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나는 일 년에 꼭 한 번씩 배가 크게 아팠다. 그리고 꼭 밤에 앓았다. 그래서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배앓이는 늘 밤을 새워 가며 나를 힘들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우리 엄마를 힘들게 했다.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내가 처음으로 학교에서 현장체험학습을 갔을 적에 내가 수영장에서 다치진 않을지 걱정이 되어 나 몰래 수영장까지 쫓아오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날 밤 너무 신나게 논 나머지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거리던 내 옆에서 엄마도 아프다며 웃으셨고 서로의 다리를 주물러준 후에야 우리는 잠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엄마를 두고 무섭고 엄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친구의 엄마가 머리를 묶는 손길보다 우리 엄마의 손길이 억세다는 걸 알았을 때, 또 다른 친구의 엄마는 편식하는 것을 두고 호통치며 화내지 않는 걸 보았을 때 꼭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다른 엄마들처럼 내가 아픈 날에는 엄마가 나 대신 아프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이상하게 약손이라는 엄마손 보다도 나는 그 말에 더 위로가 되고 왠지 금방 이불을 떨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장이 더딘 건지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엄마와 비슷한 키가 되었다. 고등학생일 무렵에도 엄마에게 이제 엄마랑 키 비슷하지? 라며 종종 물어봤지만 그렇다는 긍정의 대답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들을 수 있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발은 진즉에 금방 커서 엄마 신발을 신고 나갈 수 있은 지는 애저녁이건만.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끈이 많이 달린 구두는 싫어하는 건 알았어도 엄마가 눈썹 문신을 한 건 몰랐었다. 아이가 엄마의 발치에서 눈썹까지 오는 데는 꽤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엄마는 가족이란 서로 위하고 아껴주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관점에서 나는 썩 가족을 가족 답게 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언젠가 들었던 그 말은 내가 “남들한테 하는 것만큼 가족한테 하면 참 좋겠다”는 평을 듣는 빈도를 줄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처음엔 서로 위하고 아껴준다는 것만큼 피상적인 말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늘 보리차가 식탁 어딘가에 놓여있길 바라는 엄마를 위해 잊지 않고 보리차를 끓여 두고, 성을 붙여 부르면 정이 없는 것 같다며 토라지는 동생을 위해 꼭 성을 떼서 부르는 것, 그리고 돌아보면 학원에 가 있는 시간이 길었던 작년, 내가 그날 저녁 후식으로 나왔던 과일을 놓치면 내 몫을 꼭 남겨두었던 것. 이 모든 게 위함이었고 아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매 하루하루는 엄마의 염원이 담긴 가족의 따스한 마음으로 지탱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혼자 약을 찾아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배가 아프면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가 와서 손을 만져 줬으면 좋겠다. 등 두드려 주고 밤이 다 새도록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 엄마와 눈높이가 같아져도 여전히 내 머릿속의 엄마는 올려다 봐야하는 사람이고, 나를 보듬어 안아줄 수 있는 커다랗고 따스한 품인가 보다.

 

정유민(사과 22)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