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우리의 삶은 제도에 대한 신뢰로 돌아간다. 수원에서 혜화동까지 등교하는 학생 A의 아침을 추적해 보자. A는 다음날 9시 수업을 위해 오늘 막 구입한 자명종을 6시에 맞추고 잠자리에 든다. 6시에 맞춘 이유는 집에서 출발하여 지하철을 이용 학교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했기 때문이다. A씨는 노량진역에서 용산역으로 가며 유난히 한강에 비치는 아침 햇살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는 혜화역에서 내려 학교로 걸어간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하루의 시작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과 3시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에 A가 몇 가지 모험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A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만들어 전혀 모르는 사람이 판매하는 자명종시계가 별 하자없이 제 시간에 울려줄 것이라고 가정하는 모험을 하였다. 만일 시계가 불량품이고 하필 이날 시계가 멈추었다면 A는 수업에 늦었을지도 모른다.

또 A는 지하철을 타면서 제 시간에 지하철이 도착하여 제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 내려줄 것이라고 가정하는 모험을 하였다. 사실 A씨는 지하철을 운행하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며 아마 앞으로 알 가망이 별로 없을 것임에도 그렇게 믿었다. 뿐만 아니라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도 A는 예전 성수대교처럼 철교가 무너지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을 하지않았다. 철교를 만든 사람이나 점검하는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함에도 A는 태연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의지하면서도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 이런 태도는 사실 무모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무모함’ 이 켜켜이 쌓여 사회와 문명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만일 이런 무모함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매 순간을 의심과 공포속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시계도 언제 멈출지 모르고, 지하철이 연착, 연발을 밥먹듯하며 다리가 수시로 무너져 내리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만성적인 신경과민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무모함을 무모함으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제도를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도란 사회속의 일정한 규칙, 그 안에 구현된 이런저런 통제, 처벌, 인센티브의 체계를 말한다. 우리는 그런 제도 때문에 사람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할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모여 사회가 돌아가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개별 사람에 대한 신뢰가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처럼 그렇게 크지 않다.

앞의 A가 결국 자명종을 믿고 잠이 들 수 있는 이유도 ‘설마’하는 생각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1. 엉터리 시계를 만들어 팔다가 발각되면 받게 될 처벌을 감수하고 생산자나 판매자가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시계를 판매한 인터넷쇼핑몰은 꽤 알려져 있으므로 문제가 있는 생산자나 판매자가 활동하게 그냥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3. 물건에 찍힌 인증은 정부의 공산품 관리기준을 통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한다면 A가 믿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제도이다.

한동안 이타적 인간, 인간의 이타적 본성에 대한 책과 강연들이 넘쳐났다. 너무 이기적인 인간들만 모아두면 삶이 팍팍해질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타적 인간들이 모이면 삶은 행복할까? 이타주의는 친사회적이고 좋은 것, 이기주의는 반사회적이고 나쁜 것이라는 구분은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독일 민족을 위해 자기 손에 유태인 몇백만의 피는 묻혀도 된다고 생각한 히틀러는 이기주의자일까 이타주의자일까? 좋은 사회, 행복한 삶을 를 만들기 위해 정말 필요한 고민과 노력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한번쯤 생각해 볼 때이다. 살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인들이 유난히 이기적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뢰를 보낼 만한 제도가 아직 충분치 않기 때문일까?

 

정치외교학과 윤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