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나래 기자 (naraekim3460@naver.com)

선택권 확보에서 더 실질적인 변화 이끌어야

고교학점제에 대입제도도 발맞춰야 할 때

2025,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된다. 교과목의 종류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과목 선택을 통해 고등학생이 자신의 시간표를 스스로 구성하게 된다. 고교학점제는 획일화된 교육과정과 대입 중심 수업으로 비판받던 고등학교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맞춤형 교육'에 초점 둔 고교학점제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자신의 진로 및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정해진 총 학점을 채워 졸업하는 제도다. 현재 고교학점제는 전체 고등학교 중 약 60%에 해당하는 연구·선도학교에서, 그리고 모든 직업계 고등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 의해 2025년부터는 모든 고등학교에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고교학점제에 따라 고등학교는 학생들의 수요를 반영해 다양한 과목을 개설해야 한다. 고교학점제를 경험한 학생들은 이에 만족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고교학점제 선도학교를 졸업한 A(사과계열 22) 학우는 실용 경제, 고전과 윤리 등 수요가 적은 과목도 배울 수 있어 유익했다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배웠던 경험은 당시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고교학점제는 맞춤형 교육을 통해 학생이 스스로 진로를 탐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졸업제도나 평가제도도 함께 변경된다. 수업일수의 3분의 2 이상을 출석하면 졸업요건을 채울 수 있었던 이전과 달리, 모든 과목에 40% 이상의 성취도를 달성하고 총 192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다. 기준 성취도에 미달한 학생이 발생할 경우, 보충 이수 프로그램을 시행해 졸업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할 예정이다. 학생마다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시간표를 구성하므로 공강 시간도 생길 수 있다. 학생들은 교내 도서실, 로비, 학습 카페 등에서 교사의 지도하에 공강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고교학점제의 핵심, 과목 선택권 확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경신고는 고교학점제 선도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1학년엔 선택과목이 없으나, 2학년은 전체 수업 중 절반 이상을, 3학년은 90% 이상을 선택해 수강하고 있다. 경신고 홍진표 교무부장은 과목 선택 전 수요 조사와 수강 신청을 각각 두 번 실시하고, 담임 및 진로 교사가 학생과 지속적으로 상담해 학생들의 학업 설계를 최대한 지원한다고 전했다. 학생 수요가 있으나 단일 학교에서 개설하기 어려운 과목의 경우 공동교육과정이 활용된다. 경기 수원시의 수원농생명과학고 전수정 교육과정운영부장은 학생들이 공동교육과정을 통해 3D프린팅 디자인, 영상 제작의 이해 등의 과목을 온라인으로 수강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수원시 소속 고등학교에서 개설 중인 온·오프라인 공동교육과정 수업은 29개에 달한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과목 선택권은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2018년 입학생부터는 문·이과 계열을 구분하지 않고 사회·과학 탐구 과목을 선택해 수강하고 있다. 해당 과목에는 사회문제 탐구 생활과 과학 여행지리 등의 진로 선택 과목도 포함된다. 2025년에는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됨에 따라 진로 선택 과목이 확대되며, 융합 선택 과목이 신설될 예정이다. 융합 선택 과목은 교과 주제를 융합하고 실생활에 응용하기 위한 과목으로 금융과 경제생활 기후변화와 환경생태 실생활 영어회화 등이 그에 속한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와 환경생태과목의 경우 탄소 저감 기술이나 기후위기 대응의 참여 방법, 관련 국제기구나 협약 등을 교육할 예정이다.


선택권 확보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려면
학생의 선택권 보장이 실질적인 고등학교 교육의 변화로 이어지려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 학교 교육학과 노진아 교수는 과목 선택권을 늘리는 것만으로 강의식 수업이 참여형 수업으로 바뀌는 등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교육부와 학교, 교사 모두 수업 및 평가 방식의 변화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목 선택권 확대가 교육 격차를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이하 교총)는 지난해 8월 보도자료를 통해 성적 하위권 학생은 형식적으로 여러 과목을 이수하는 데 그쳐 성취도가 낮아질 수 있다고 전했다. 지역 간 교육 격차 문제도 제기된다. 교총 김주영 선임연구원은 농어촌은 지방대학의 수, 인적 자원 등이 부족해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고교학점제 선도지구 지원사업을 통해 농어촌 고등학교가 주위 고등학교 및 대학교와 연계해 교·강사를 확보하고 온라인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학생의 수요를 최대한 반영한 교육과정 운영을 위해선 교원 확보가 필수적이다. 고교학점제 시행 시 수업의 질 향상을 위해 수업 당 학생 수는 제한된다. 이때 각 학교에서 운영하는 수업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교원 수급에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 전 운영부장은 새롭게 개발된 과목의 수업을 위해 현재 교육청에서 교사 연수 등을 진행하고 있으나, 교사의 부담이 커 교원 확충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변화, 대입제도가 뒷받침해야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2024년 하반기에 고교학점제가 반영된 대입제도를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 고등학교 평가제도에서 성취평가제(절대평가)가 확대된 점이 대입제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가 관건이다.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모든 선택과목에 A·B·C·D·E 및 미이수로 성적이 표기되는 성취평가제가 적용된다. 내신 등급의 유불리에 따라 학생이 듣고 싶은 과목이라도 수강을 포기하는 등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노 교수는 고교학점제의 취지를 고려했을 때 과정 중심 평가를 지향하는 성취평가제가 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기존 9등급제(상대평가)의 축소로 대입의 혼란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 구본창 소장은 성취평가제의 성취도 기준은 시험 문항의 난이도 등에 기반해 체계적으로 설정되고, 성적표에도 성취도별 학생 분포 비율이 기재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구 소장은 다양화된 교육을 강조하는 고교학점제와 획일화된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한 수능은 근본적으로 상충한다고 말했다. 201911월 발표된 정부의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방안에 따라 2023학년도 대입에서 서울 주요 대학 16개의 정시 비율은 40.5%로 확대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2월 대선 과정에서 정시 비중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밝혔으나, 이는 당선 후 발표한 국정과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현재로선 고교학점제에 따라 대입제도가 어떻게 변화할지 불투명하다.

또한 고등학교 3학년에 선택과목의 비중이 가장 높게 배치된 상황에서, 해당 선택과목의 수업이 자습 시간이나 본래의 과목 내용과 관련 없는 수능 문제 풀이를 하는 시간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교원대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김성천 교수는 고교학점제의 성공적인 도입을 위해서는 정시 비중 축소와 대학교 차원에서 특정 과목 수강 여부를 확인하는 등의 방안을 통해 기존 취지가 실현돼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과정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필요할 때
교육부는 2007년부터 수시 개정 체제하에 고등학교까지의 교육과정을 필요에 따라 변경해왔다. 고등학교 교육과정 내에서 교과목의 내용이나 종류는 꾸준히 바뀌어 왔지만, 고교학점제처럼 고등학교의 수업 이수 체계가 대폭 변경된 것은 이례적이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변화에는 무엇보다도 교육 현장에 대한 깊은 고려가 필요하다. 고교학점제는 고등학교 교육의 체계를 크게 바꾸는 제도임에도, 2018년 문재인 정부에서 시범 도입되기 시작해 2025년 모든 고등학교에 적용될 만큼 짧은 기간 내에 추진됐다. 교사의 업무 부담이나 학생과 학부모가 겪을 혼란은 충분히 고려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고교학점제는 시행목적과 비전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기반으로 공고하게 추진돼야 할 것이다. 김 교수는 장기적 비전이 없다면 개별 고등학교가 대입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수능 중심으로 수업을 설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 교수는 고교학점제를 포함해 향후 어떤 교육제도라도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과 국민적 공감에 기반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