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19세기 초반 각국 정부가 대학을 사회에서 명민한 구성원들을 양성하는 연구와 교육의 전당으로 탈바꿈시킨 이래, 대학의 연구, 교육 기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동문들이 대학에 상당한 자금을 투자, 연구자와 교육자들의 대담한 활약을 뒷받침하며, 대학당국은 강의평가와 업적평가를 통해 대학교원의 연구와 교육의 질을 높이는 압력을 행사한다. 대학은 전문직업인, 기업인, 관료와 교원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이 진보함에 따라 때로는 기존 직업의 성격을 현저히 변화시키거나, 아예 새로운 직업을 창출하기도 했다. 의사는 의료기술을 개발하고 보건행정의 주축으로 거듭났으며, 때로 빈민에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운동가가 되기도 했다. 경영학자는 첨단기술을 운용하며 덩치를 불리는 기업들을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도록 기업 관료제를 손볼 고숙련 전문경영인들을 양성했다. 자연과학자와 공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업을 설립하는 일도 이제 낯설지 않다.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도 교육과 학술출판 프로그램을 정비하고 사료와 데이터 활용의 신기술을 개발하며,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는 졸업생을 배출한다.

또한, 이제 대학에서 공부할 교육기회는 사회 극소수의 특권이 아니다. 식민지배, 경제공황과 전쟁 등 다사다난한 지난 200년간 대학교육기회가 세계적으로 고르게, 순조롭게 확대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 식민당국이 경성제대를설립한 이래 동일 연령대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비중이 늘어나 2020년에는 70%를 돌파했다. 이는 학생의 취직전선에 좋은 소식은 아니다. 20세기 후반 대기업 화이트칼라 일자리가 늘어나며 기업에서 그 해 대학 졸업자를 대량 채용하는 소위 일괄채용(一括採用)이 제도로 정착했다. 그러나 1990년대를 거치며 취직 경쟁이 생겨나더니 현재는 일괄채용이라는 고용관행 자체가 축소되고 있다.

때문에 2020년대 학생이 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지만 대학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실현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일괄채용이 축소되고 경쟁이 일상화되며 자신이 누구보다 뛰어난지는 알아도 정작 어떠한 점에서 쓸모가 있는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이는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쓸모를 상상하고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전공과 크게 상관없이 명문대 졸업생들이 대기업이나 학교에 줄줄이 채용되던 일괄채용 시대에는 자신의 쓸모를 정확히 모른다고 취직이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대학을 간판으로만 활용하면 낭패를 당할 위험이 크다. 치열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취직시장 구인 측의 흔한 푸념은 뽑을 사람이 없다는 것인데, 결국 이는 지금 인재양성 파이프라인에 문제가 있기는 하나 그만큼 학생들에게 기회가 열려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질문은 간단하다. 당신은 무엇을 할 때 행복하며, 대학에서 어떻게 무엇을 배우면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가?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말을 선택하고 이어붙이는 단계에서, 스스로 사안을 분석하며 주장을 제시하고 뒷받침하는 단계로 비약하는 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자신에 필요한 수업이 정해져있는 것도 아니며, 그 수업을 들으며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도 스스로 정해야하는데, 이 또한 쉽지 않다. 학점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자신이 B급 학생이라며 좌절하지 않고, 어느 기술을 어떻게 추가적으로 연마할지 생각할 때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한다. 자신의 부족함이 어떠한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할 때, 스스로를 함부로 책망하지 않으면서 타개책을 가늠하고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유지하는 데에도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어려워도 절대 못할 정도의 일은 아니다. 필자는 일괄채용 시대의 끝자락에 대학에 별 생각없이 입학했던 경험이 있어 조언을 건네면서도 창피하지만, 교원으로서 미력하나마 소통이 어느정도 이루어지며 간헐적 무능과 몰이해는 있어도 만성적 태업과 조직적 부패는 없는 학문 공동체를 만드는 데 노력하겠고, 성균관대 학생들 모두 행운을 빈다.


 

최자명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