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하진 기자 (noterror0404@skkuw.com)

시간이 흐를수록 뉴스를 보는 것이 꺼려진다. 날마다 새로운 비보가 전해지며, 새로운 고통들이 전해져온다. 그런 소식들을 들을 때 우리는 비통하다. 비통함이란 슬픔과 함께 무력감도 포함하는 표현이다. 사전에 ‘비통하다’를 검색하면 ‘grief-stricken’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이때 ‘grief’는 비탄, 특히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것을 뜻하며, ‘stricken’은 갑작스럽게 닥친, 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비통함은 죽음 등과 같이 갑작스럽게 닥치며,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는 슬픔을 가리킨다.

몇 주 전 미약한 비통함에 시달리던 때에 도서관을 거닐다 한 책의 제목이 내 눈길을 끌었다.『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마음이 가지는 중요성을 역설한다. 주제에 부응하듯 핵심이 되는 표현은 마음의 ‘부서져 열림’이다. 어떠한 비극으로 인해 마음이 부서지면 그 마음은 냉소와 두려움, 증오로 닫힐 수도 있다. 그러나 부서진 마음이 열린다면 오히려 사회의 갈등과 긴장, 다양성을 끌어안아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원동력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외에도 본문에서는 ‘해야 한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비통함에 맞서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가져야 할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들이 꽤나 잔인하지 않나 질문해볼 수밖에 없었다. ‘부서져 열림’이라는 표현에서 비통한 자의 부서짐은 그저 열림을 위한 과정으로 취급될 뿐이다. 또한 비통한 자에게 ‘해야 한다’는 어떠한 울림도 주지 못한다. 무수한 ‘해야 한다’가 지켜지지 않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해야 한다’가 의미를지닐 수 있을까. 오로지 하나의 ‘해야 한다’만이 비통한 자 뒤에 따라올 수 있다. 그들은 ‘들려야 한다’. 이는 곧 ‘들어야 한다’의 의무로 이어진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영화 ‘올드보이’로 유명한 대사지만, 사실 이 구절은 미국의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의 시 ‘Solitude’에서 인용한 것이다. 윌콕스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여인을 위로하려다 실패한 채 이 시를 쓰게 됐다. 따라서 ‘Solitude’는 인간의 본질적 고독을 상기시키는, 어찌 보면 비관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이미 각자의 원인으로 울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같은 바닥을 딛고 서로를 끌어안을 수라도 있도록 슬픔을 나눠야 한다. 그러니 이 비통함은 들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들어야 한다.

비통함은 비극을 직접 겪은 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이들 역시 일상을 살며 슬픔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 앞선 비판에도 불구하고『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골자는 유효하다. 결국 민주주의 사회를 추동하는 것은 마음이다. 당신이 느끼는 비통함이 들리도록 하겠다는 마음. 그리고 비통함이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 이러한 마음들이 모여 모든 것을 바꿔왔다. 그러니 당신, 비통하다면 이야기하자. 이것은 명령이나 당위가 아닌, 함께 하자는 제안이다.

 

김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