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여러분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요? 아마도 이 광범위한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답변이 가능하고, 그중에는 긍정적인 것들도 꽤 많을 터입니다. 이를테면 일본은 여전히 근사한 애니메이션과 만화와 게임을 만들어내는 곳이고,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는. 그럼 질문을 좀 바꿔봅시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라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이미 자명한 답이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거의 우문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일체의 반성도 하지 않으며 부인하고 심지어 날조하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인다. 종종 이 답변에는 독일이 어떻게 철저한 반성을 통해 과거사를 극복했는가라는 대조항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전부일까요?

여기 한 선언문이 있습니다.

근대 일본의 발전은 근린 소수민족에의 억압과 타국을 식민자화한 과정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침략전쟁을 확대하였고 그 결과 패전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전후 부흥이라는 것은 한국전쟁(한국전쟁 특수), 베트남전쟁(고도 경제성장의 토대) 덕택이다. 즉 전후가 되어서도 일본은 침략행위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침략한 나라(지역)의 인민들이 흘린 피에 의해 변함없는 번영을 향수하고 있다. 이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3세계에의 재진출과 억압, 착취의 반복에 책임이 있는 것은 현재 이 나라의 구성원 중 하나인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단지 비판이나 반대를 외치는 것만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적으로 이를 저지할 것이 요청된다.”

이 선언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197431(이 의미심장한 날짜!) 배포한 팸플릿 하라하라토케이(腹腹時計): 도시게릴라 병사 독본 vol.1에 실려있습니다. 근대 일본의 발전이 근린 소수민족에의 억압과 타국을 식민지화한 과정이었으며, 나아가 전후 일본의 경제 발전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결과라는 명료한 인식.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전쟁이 야기한 막대한 전쟁 특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50년대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베트남전쟁 특수로 인해 이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전쟁 이후 세대입니다(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구성원들은 19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초반생들이었습니다). 즉 생물학적으로 식민과 전쟁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이곳을 살아가는 자들로서의 분명한 연루의 감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사건들이 현재를 만들어 나간 것이며, 그 현재에 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때 요청되는 것은 단지 비판이나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인 실천이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실천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197112월 아타미의 흥아관음상과 순국칠사의 비를 폭파했으며(흥아관음상은 스가모에서 처형된 A급 전범 7인중 하나이자 남경학살의 책임자인 마츠이 이와네가 중일전쟁에서 죽은 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관음상이며, 순국칠사의 비는 1968년 마츠이 이와네,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A급 전범을 위령하기 위해 건립된 비였습니다), 19724월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죽은 일본인들이 유골이 묻혀 있는 요코하마의 총지사 상조전을 폭파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아이누 침략의 기록보관소라 할 수 있을 홋카이도대학 북방자료실을 폭파했습니다.

제국 일본과 관련된 이 상징들에 대한 공격은 천황의 이름으로 수행된 저 전쟁의 실제 책임자, 바로 쇼와 천황에게로 향합니다. 쇼와 천황은 이들이 유일하게 사형을 집행하고자 한 대상이었습니다. 이들의 선언문에 따르면 아시아 인민의 역사적 증오와 원념은 우리들 일제 본국인에게 무엇보다 먼저 천황 히로히토를 사형 집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74814일 쇼와 천황이 타고 있는 기차를 폭파할 계획이 수립되지만 결국 미수에 그칩니다. 같은 8월 전범 기업이자 현재아시아에 대한 경제 침략의 첨병인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한 공격이 감행됩니다. 1974830일 도쿄 마루노우치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가 폭파되었습니다. 폭탄 설치 직후 이들은 폭파 계획을 건물 관리소에 알리고 사람들의 대피를 촉구했으나, 전화는 장난 전화로 치부되었고 결과 8명의 사망자와 37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본지 1709호에서 이어짐)

 

 

 

 

이영재 비교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