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여러분은 지난 1707호에 소개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폭파 사건에서 결과적으로 어떤 이들이 무고한 죽음과 상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하여 그 행위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물론 찬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970년대에 어떤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한 반성적 사유에 이르고 있었는지를 가늠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과거사 반성에 있어서 종종 일본과 비교되는 독일은 1970년대까지 놀라울 만치 비슷한 경로를 걸어갔습니다. 과거사 극복과 관련된 전진과 후퇴는 냉전이라는 구조적 제약(미국의 대유럽 안보라인과 동아시아 안보라인)과 여기에 맞서는 내부의 운동 사이의 역학들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1950년대 점령지로부터 독립 국가로 전환된 두 전후 국가의 시스템 상층부는 구체제의 인적 자원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동시에 각각의 다른 역사적 재료를 통해 피해자 내셔널리즘이라고 할만한 심성을 만들어냈습니다. 독일의 경우 ‘국가를 지켰을 뿐’인 독일군과 악독한 나치 친위대를 분리했으며, 일본의 경우 소수의 전전 군부의 상층부와 일본 민중을 분리하는 한편 원폭 경험을 피해자 내셔널리즘으로 전환했습니다. 

역사는 그저 자연적으로 청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의 저항과 외부의 조건들(이 외부의 조건 또한 외부를 구성하는 각각의 내부에서 형성된 저항들이 만들어낸 조건일 터)의 복잡한 만남 속에서 역사에 관한 사유는 계속해서 재조정됩니다. 일본과 독일 모두 결정적 전기는 68로 상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독일의 전후 세대는 나치즘에 동조했던 아버지, 어머니의 세대를 계승하기를 거부했으며, 일본의 전후 세대는 아이누와 오키나와, 대만, 조선에 이르는 구 제국의 팽창과 그 결과 현재 일본 사회의 ‘이물’을 구성해내는 식민주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역사란 단절이 아닌 연속이며, 다만 단절의 욕망이 과거 없는 현재를 만들었을 뿐이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과 독일의 학생운동, 정치운동은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였습니다. 독일의 과거사 사죄의 상징적 장면,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 장면이 1970년이라는 시간에 도착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부의 저 격렬한 저항(과거사 반성을 포함한)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일본의 이후 경로는 그토록 달라 보이게 되었는가? 왜 독일은 과거사 극복에 성공했다고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데 반해 일본은 그렇지 못했는가? 이제는 여기에 답할 차례입니다. 

1979년 미국 NBC의 4부작 시리즈 <홀로코스트>(1978)가 방영되었을 때, 당시 서독 인구의 약 1/3이 이 드라마를 시청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홀로코스트는 독일에서 대중적 수준의 앎을 낳았고, 분노와 자성의 촉발점이 되었습니다. 1983년 베를린의 옛 제국의회 건물에서 역사학자와 일반 대중이 함께 참여하는 대토론회가 열렸으며 1985년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은 나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독일인 전체가 져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이 사건들은 단지 독일이 어떻게 과거사를 ‘극복’해나갔는가만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떤 주변의 압력들과 연동되어 있었는지까지를 보여줍니다. 독일이 미국 내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존재, 1957년 로마조약 이후 유럽경제공동체로 묶인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있었다면, 일본은 적어도 1980년대 중후반까지 과거사로 연결된 국가들로부터 그 어떠한 실제적 압력도 받지 않았습니다. 한국과 대만은 1980년대 후반까지 냉전의 프론티어로서의 역할만이 강제된 독재국가였으며, 중국은 1970년대 후반 개혁개방 노선으로의 변경 이후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국제무대에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태평양 전쟁과 관련되었던 동남아시아 각국 또한 쿠데타와 독재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1965년의 한일 협정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도 되었는가, 한국과 같은 제국-식민지의 직접적인 과거사로 얽혀있는 나라가 무엇을 방기했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입니다. 역사의 정의에 대한 요구는 오로지 경제적 방식과 반공 연대로 봉쇄되었습니다. 이 구조 위에서 1970년대 일본의 정치운동이 도달했던 자기반성적 사유는 고립된 투쟁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일본에서는 거의 잊혀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라는 이름을 새삼 상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이름은 우리가 역사 속에서 무엇을 실기했는지, 혹은 무엇이 질문되었고, 무엇이 응답되지 못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저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봉쇄 속에서 1970년대의 한국은 이의제기에 동참하지 못했고, 그들은 고립되었으며, 역사에 대한 인식은 퇴행했습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섣부른 화해가 아닌 이의제기이며, 그 속에서야말로 역사의 정의를 요구하는 개별 시민들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렬한 사례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영재 비교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