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가현 편집장 (dreamer7@skkuw.com)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또래 친구들의 주된 대화 주제는 단연 ‘개그콘서트’였다. 일요일 저녁이면 졸린 눈을 비벼가며 텔레비전 앞을 지키고 앉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시절 개그콘서트는 친구들의 대화에 끼고 싶으면 반드시 시청해야 하는 필수 프로그램이었다. 한 주라도 건너뛰는 때에는 월요일 아침에 쏟아지는 친구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시기를 거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웃음이 곧 문화라는 걸 이해할 터다. 이야기를 나눌 소재, 공감대의 형성, 파생되는 요소들에 대한 향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타이밍에 웃음을 터뜨린다는 건 살아온 배경이 유사하다는 의미다. 농담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불편하게 여기거나 그렇지 않은 지점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오래 가는 친구의 조건은 ‘웃음 코드가 맞을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우선 호오가 들어맞고 나면 대부분의 문제는 별것이 아니게 된다. 대중의 문화는 그런 식으로 형성된다.

한때 사람들은 남을 깎아내리며 웃음거리로 소비했다. 타인의 외양을 비꼬거나 어정쩡한 행동 따위를 흉내 내며 희화하해 웃음을 유도했다.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기된 후에는 이른바 ‘자학 개그’가 유행했다. 타인 대신 자기를 깎아내리며 우스운 상황을 연출했다. 그것이 쿨한 모습이자 성격이 비슷한 집단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런 웃음이었고 그런 문화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예리한 시각으로 웃음을 후벼파는 사람이 늘어나면서부터 농담은 더욱 교묘한 모양새로 돌아왔다. 광고계를 휩쓴 ‘다나카’가 흉내 내는 어눌한 한국어는 뭇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준다. 유창하지 않은 외국어를 누군가 따라 하는 일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 대신, 몇 일본인과 유학생을 인터뷰하곤 ‘이들이 괜찮다고 하더라’ 주장하는 언론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러나 지방에서 올라와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농담의 대상이 됐던 입장으로서, 필자는 ‘다나카’의 언어유희를 두고 마냥 즐거워할 수 없다.

개그맨 본인이 가진 서사와 적재적소에 자신을 들이미는 센스 앞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테다. 어눌한 발음은 아주 작은 요소에 불과한데 왜 그리도 불편해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이미 문화가 된 웃음의 책임을 어떤 개인에게 지우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러나 웃는다는 건 굵은 소금을 뿌리는 일과도 같아서 누군가에겐 잠시 가렵고 말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이미 난 자리의 상처를 덧내는 무기가 된다. 그러니 최소한 자신의 웃음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웃음소리는 잠시 광장을 채웠다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영원히 남아 이곳에 머무니까.

지난 한 주를 되새겨보자. 많이 웃었는가? 그 웃음이 모두 정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고백하건대 아닐 것이다. 필자 역시 모든 웃음 앞에 당당하지 못하다. 어떤 웃음은 부끄러웠고 또 어떤 웃음은 무지했다. 다시 묻겠다. 이젠 어떻게 웃을 것인가? 필자는 정당하지 않은 웃음 앞에서 침묵하는 것을 용기라 부르겠다. 아주 재미없는 용기. 그리고 이 용기를 발휘하겠다고 약속하겠다. 그러니 당신도 그러면 좋겠다. 조금은 재미없어도 좋으니 모든 사람이 함께 웃을 날을 바라기 때문에.

김가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