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사회적 약자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동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억압과 차별을 받는 사람들. 그런데 여기에 약자 중의 약자가 있다. 여성이며 또 노동자로서 이중고를 겪는 여성노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제 이들은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에서 한발 더 나아가, 평화와 인권 등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성의 이름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 96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이 날 저녁에 성신여대에서 문화제가 있었는데 성대에서도 80명 가량의 학우들이 참가했었다. 올해의 슬로건은 ‘여성의 몸의 권리를 여성에게, 여성에게 평등한 일자리를, 여성에게 전가되는 이중노동부담 반대’였는데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의 날은 ‘여성 노동운동’과 관련이 깊다. 부당한 노동환경 속에서 차별 받던 미국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여성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여성의 날’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신여대에서의 문화제가 끝나고 한 새내기가 자신은 지금까지 여성으로 살면서 차별 받은 적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순간 1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여성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과격한 여성주의, 여성 우월주의, 여성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었고, 나 자신은 지금까지 성차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면서 성차별로 인해 피해 받는 여성들과 나 사이는 뭔가가 다르며, 페미니즘은 상처받고 피해 받은 여성들의 탈출구라고까지 생각했었다.

아,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나. ‘노동문제연구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의 삶을, 대중의 삶을 주류언론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고 자연스레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여성노동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삶은 남성들의 삶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이윤을 창출 할 수 있는 활동만을 노동으로 한정짓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노동을 하고 있었으며, 나의 어머니의 직업은 ‘무직’이 되어버렸다. 여전히 뚜렷한 이유 없이 여성노동자들은 해고당하고 있고, 여성노동자의 70%가 비정규직이며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전체 정규직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페미니즘은 이런 성차별과 성차별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성차별의 종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에 대한 성차별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페미니즘은 유효하며 인종주의, 계급주의 등 인간에 대한 억압과 불평등이 있는 곳에서 페미니즘이 방안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노동자계급, 인종주의, 가부장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전쟁 속에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억압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이렇게 남성에 비해 여성이 받는 피해와 억압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주의, 계급주의, 가부장제, 전쟁 등 인간을 억압하는 것 자체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다. 그 속에서 남성 또한 여성과 마찬가지로 억압받고 있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한 후배가 내게 한 말이 기억난다. ‘소수자’라 함은 그 수가 소수여서 소수자가 아니라 그/그녀들이 사회에 말할 수 있는 권력과 권리, 힘이 작아서 ‘소수자’가 아니냐고. 노동자도, 빈민도, 여성도, 장애인도 이 사회의 소수자이다. 나는 이 소수자들의 말을 들으려 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시선.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은 ‘자매애’가 아니라 ‘인간애’라고 생각한다.

노동문제연구회 알기  정주연(정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