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의 십자가, 돌아섰나

기자명 이상헌 기자 (goots@skku.edu)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명동성당은 1898년 5월 29일에 준공 돼 △일제강점기 △6·25 △민주화 투쟁 같은 굵직한 사건과 함께 한 건물이다.

근현대사에서 명동성당의 의의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라 불린다. 축성 1백6년이 되는 올해나 성당이 세워진 1898년이나 변함 없이 한 자리에 우뚝 서 있다.

일제 강점기때 명동성당은 가톨릭 청년과 여러 의사들의 모의 장소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말에 성당의 종까지 공출 당할 뻔 했으나 주교와 신도들의 노력으로 막기도 했다. 또 6·25때는 지하묘역 순교자의 유해 수색이 이뤄지기도 하고 한국군들의 피난처 역할도 했다.

명동성당에 대해 「명동성당 100년」이라는 책에서 조선일보 이준호 기자는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요람 △순교의 성지 △민주화의 성지로서 격변과 다이나미즘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를 지켜왔다”며 “순교 정신이 구현된 복음전파의 요람으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피난처로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서있다”고 평했다.

명동성당의 대표적 투쟁
명동성당은 지금은 이주노동자들의 천막이 있지만 1987년에는 민주화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6월 항쟁’의 진원지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백27차례 연 인원 6만1천명이 성당 앞에서 집회를 가졌고, 해마다 1백여 건 내외의 집회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외에도 1975년 2월 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회복 및 국민투표 거부운동’, 1976년 3·1절 기도회 사건 등등 명동성당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에서 시대의 고뇌와 아픔을 대변하는 정치·사회의 중심무대로 공개장의 역할을 해왔다.

지금의 명동성당
2004년 5월, 명동성당으로 들어서는 언덕길에는 이주노동자들과 건설노조들의 천막이 쳐져있다.

△이주노동자 차별철폐 △민중생존권 확보 △8시간 노동시간 쟁취 등 불합리한 현재의 대통령령인 이주노동자 법률을 개선하라는 구호를 걸고 있다. 또한 건설노조는 조합활동 합법화와 노조 전임자 수배 해제를 구호로 걸고 정부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러나 성당 측은 이들의 농성에 대해서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민주노총의 투쟁 때, 성당 측은 “30일 간의 농성기간이면 정부와 민주노총 내의 논의 기간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며 “애초에 피신처로 제공했던 취지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 퇴거 요청을 한 적이 있었다. 투쟁을 보는 관점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성당 앞에서 이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김범진 씨는 “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에 속해있는 것이며 바람직한 사회 없이는 바람직한 신앙이 있을 수 없다”며 “여타의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낮은 자, 핍박받는 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참 종교인 것 같다”는 의견을 말했다.

명동성당을 바라보는 시선
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명동성당에서 열린 집회와 시위는 지금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 사건에 관한 자료집」을 보면 △집회참가자 △성당관계자 △신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국미사 잇따라’라는 제목으로 실린 95년 6월 23일자 한겨례 신문에서 “정권의 도덕성 회복을 위한 시국기도회에 사제와 신자 4백여 명이 참여했으며 명동성당 공권력 난입에 항의하는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다”며 당시 명동성당에서 이루어진 투쟁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명동성당 앞에서 20년 간 가게를 운영한 표영욱 씨는 “장사를 하면서 이곳보다 문을 많이 여닫는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회와 충돌이 많이 있었다”며 “하지만 당시에는 내 장사보다 집회자를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해, 예전과 달라진 사람들의 반응을 아쉬워했다. 한편 명동성당 관계자는 성당 앞 투쟁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신자인 전필용 씨는 “민주화 투쟁이라는 대의명분이 확실했던 때의 집회와 지금의 집회는 성격이 다르다”며 “성당을 피신처 삼아 농성을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고 말했다.

한때 명동성당은 ‘시국기도회’까지 열면서 사회적 담론의 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집회자들에게 퇴거 요청을 하고 9시 이후 출입을 금지해, 곳곳에서 명동성당의 투쟁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함께 성당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신태혁 씨는 “공권력에 맞서 당당히 목소리를 내고 약자의 편에 섰던 명동성당이 됐으면 좋겠다”며 “이전과 같이 사제와 신도들까지 참여하지는 않더라고 최소한의 공감대는 형성돼 투쟁에 힘을 얻었으면 한다”고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