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114년을 맞는 이번 메이데이는 △이라크파병철회 △열사정신계승 △비정규직 철폐라는 기치로 대학로에서 열렸다. 민주노동당의 국회입성이라는 놀라운 성과에 이전의 메이데이와는 다른 분위기도 띠었지만 전쟁과 자본에 반대하고 새로운 세상을 원한다는 강한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1886년 미국.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 넣고,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울 때,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 장시간의 노동에 일주일에 7∼8달러의 임금으로 월 10∼15달러하는 허름한 판잣집의 방세내기도 어려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고, 경찰은 파업 농성중인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를 발포, 살해했다. 다음날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30만의 노동자·시민이 참가한 헤이마켓 광장 평화 집회에서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지고 경찰들은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이후 폭동죄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억울하게 폭동죄를 뒤집어 쓴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장기수 또는 사형수가 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당시 구속 또는 사형된 노동운동가들은 모두 무죄였던 것이 증명됐다. 이것이 발단이 돼 제2인터네셔널에서는 5월1일을 노동절·노동자의 날로 선포하고 이것이 지금까지 114주년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와 한국은 역사적 자본주의의 몰락 단계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의 위기’를 지연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자유주의’라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적극적 공격을 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세계와 한국은 ‘금융세계’, ‘전쟁’ 등을 특질로 갖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점령당해있다. 신자유주의의 노동자민중에 대한 적대적 공세 속에서 114년전의 이야기는 가슴 아프게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부당한 억압과 착취는 불행히도 눈앞의 현실이다. 전태일 열사의 유서와 30여년이 지난 김주익 열사의 유언장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은 이 나라에서는 △장애인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이동권 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대적 차별(인간사냥) △강제추방과 노동의 권리를 외면하는 현실 △이라크민중의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이라크전쟁에 파병을 하는 현실이 스스럼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빈민 1000만, 청년실업 100만은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이번 메이데이가 몇 년째 상당히 관성화 됐고 민주노총이나 민노당이 소위 ‘총선 승리’의 샴페인을 터트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현재의 노동절이 ‘당’과 ‘지도부’의 이름에, 현재의 노동자·민중의 ‘운동’이 △사회적 합의주의 △개량주의 △사민주의에 압살당하고 있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 쟁취와 신자유주의 분쇄라는 역사적 과업은 ‘노총’이 또는 ‘당’이 대신하는 것도 아니며 언제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언제나 대중들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노동자는 임금협상 보다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며, △농민 △빈민 △여성 △장애인 △학생들은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주권을 요구한다. 민중의 대대적인 요구는 언제나 직접적이며 다양한 목소리들을 포괄하는 그 무엇이다. 이번 노동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하는 바는 사회혁명 없는 정치혁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20세기의 패배를 다시 한번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어떠한 혁명도 공산당이나 또 다른 어떤 당이 아니라 오히려 수백만의 사람들을 포괄하는 운동, 즉 대중운동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혁명은 이론가들, 정치적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창발적이며 폭발적이기 때문이다.“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공산주의자 선언, 맑스)는 말이 새롭다.

일하는 사람들’
박계성 (유교철학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