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저는 지난 30년간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학의 경이적인 발전을 지켜보았습니다. 짧은 전공지식으로만 알고 지내던 정보들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영역까지 진보하는 공학의 성취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 특히 최근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경지로 발전해가는 추세입니다. 이런 추세는 공학자와 과학자를 자신의 직업적 영역에 좀 더 깊숙하게 매몰시킵니다. 하지만 제가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 것은 성공적인 직업적 성취만이 인생의 성공이나 행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직업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허무나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인 삶의 의미, 공허, 죽음, 실존 등에 직면하게 됩니다. 다행히 여러 인문학 관련 책에서 이에 대한 과거의 경험적 사색이나 인생의 고민에 도움이 되는 글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책에서 우리는 위로와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직업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직업적 영역이 전문적으로 확대되고 심화될수록 필연적으로 자신의 영역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부정할 수 없는 물질사회이며, 이 사회는 여러 가지 동력장치, 에너지 장치, 정보통신 그리고 각종 운송수단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합리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면 물질문명의 기본이 되는 과학적, 공학적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코로나와 관련된 거짓 정보에 속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생물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구온난화,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여러 거짓 정보도 같은 유형입니다.


1959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리드’ 강좌에서 당시 영국의 과학자이자 소설가인 찰스 퍼시 스노는 ‘두 문화’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두 집단이 서로 소통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인문학 전공자는 과학, 공학적인 주제에, 공학자는 사회 연관성과 가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즉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의 학문에 대하여 몰이해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퍼시 스노의 강연 후 70년이 흘렀지만 그가 주장한 두 문화의 만남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통을 강조합니다. 소통은 말이나 감정의 교류뿐만 아니라 지식의 교류도 포함합니다. 서로 다른 전공의 언어로는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인문,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과 공학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두 개의 큰 문화입니다. 서로의 학문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두 문화가 소통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하는 사람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읽는 것은 인문, 사회과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열역학 2 법칙”을 이해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식상해 보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대학은 취업준비생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지성과 교양을 갖춘 사람을 키우는 곳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앞으로의 삶은 과거보다 더욱 소외되고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직업적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삶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인생의 아름다움과 아울러 인생의 부조리를 맛보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화학공학/고분자공학부 한귀영 교수
화학공학/고분자공학부 한귀영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