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세차게 비가 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한 날씨가 이어진다. 변덕을 부리는 봄날의 날씨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태도도 이랬다저랬다 하는 요즘이다. 어느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함이 찾아오다가도, 때로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싶다는 갈증이 샘솟기도 한다.

변덕스러운 날씨, 오락가락하는 내 기분과 다르게 시간은 진득하리만큼 정직하게 흘러간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원 강사 알바를 하러 지하철에 올랐다. 그때부터 꽤 긴 시간을 가야 했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옆자리에는 한 어머니께서 아기를 안고 앉아 계셨다. 아기는 속세의 그 어떤 때도 묻지 않은 웃음을 방긋방긋 지어 보였고 나를 비롯해 그 칸의 거의 모든 이들은 함께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던 것도 잠시, 아기는 이유도 없이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그 맑은 웃음을 짓던 이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아기의 기분은 몇 분 내에도 변화무쌍했다. 다만 이 변덕에 그저 당황만 하고 있던 나와 달리, 노약자석에 앉아 계신 노인 몇 분은 당연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해를 넘어 공감의 시선에 가까웠다. 나도 그랬단다, 하는 시선. 아기와 노인, 결국 그들의 삶은 각기 다른 파형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는 것이 보였다. 

시간을 건너 같은 작동 방식을 보이는 우리네 삶은 결국 빛과 어둠, 슬픔과 기쁨, 고통과 쾌락을 반복하여 겪는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에도 삶의 변화와 굴곡, 여러 외부 자극에 매번 낯섦과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이 당연한 변덕에 인간이 평생을 휘둘리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약간의 허무주의를 안고선 계속해서 일터로 향했다. 

학원에서의 1교시는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었다. 그중 한 아이는 최근 부모의 이혼을 겪었다. 한창 갈등 과정에 놓여 있을 때 아이는 산만한 수업 태도를 보였더랬다, 혼잣말처럼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아이가 법적 이별을 확실시하자 오히려 마음을 가다듬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제부터는 열심히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제 얼굴만 한 안경을 고쳐 쓰는 이 작은 아이의 모습에서, 나는 문득 아기의 변덕에 공감하던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어두운 시간을 이겨내고 스스로 빛을 맞이하고자 하는 자의 모습은 나이를 막론하고 삶의 변덕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관한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인간은 삶의 변덕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변덕을 맞이하듯 다음 단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웃음이 가득한 사람도 때로는 눈물 흘릴 때가 있는 법이고, 아픔을 겪고 나면 행복을 향한 더 큰 의지가 생기기도 한다. 마치 우리가 움직이기 위해선 당연하게 지하철을 기다리고, 타는 것처럼, 살아가기 위해선 크고 작은 변화를 당연하게 기다리고 또 한 번 겪어내면 되는 것이 아닐까. 또 하나의 작은 변곡점을 맞이한 그날 역시 나는 여느 때처럼 지하철을 기다렸다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날의 기다림은 결코 답답하지 않았고, 만원일 지하철이 두렵지도 않았다. 당연히 올 차니까 괜찮았고, 어차피 탈 차니까 괜찮았다.

                                                                         윤채원(프문 21) 학우
                                                                         윤채원(프문 21)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