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기자 (webmaster@skkuw.com)

 <선 위의 세계 Welt am Draht>(1973)는 파스빈더가 연출한 유일한 SF 영화다. ARD 텔레비전의 의뢰를 받아 제작된 2부작 TV 시리즈였던 터라, 1973년 10월 14일과 16일에 딱 한 차례 방영되고 어디에서도 공식적인 재상영이 이뤄지지 않았다. <선 위의 세계>가 온전한 복원판으로 세상에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2010년 베를린 영화제 덕분이었다. 

파스빈더는 다니엘 F. 갈루예의  SF 소설 <시뮬라크론 3 Simulacron-3>(1964)를 뼈대 삼아 <선 위의 세계>의 각색 대본을 완성했다.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시뮬라크론 3는 Reactions Inc에서 소비자 마케팅 연구를 위해 개발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다. 시뮬라크론 3에 구축된 도시는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정교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가상 주민들은 자신들이 바이너리 코드의 번쩍거림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 못한다. 시뮬라크론 3를 운영하는 연구소에선 가상 주민들의 소비 동향을 분석하는 것만으로 여론 조사보다 훨씬 정확한 마케팅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갈루예의 소설에선 시뮬라크론 3 안팎의 경계가 교란된다. 이 시뮬레이션을 운영하는 주체인 줄 알았던 Reactions Inc의 과학자가 사람들 눈앞에서 수증기처럼 증발하고, 이해할 수 없는 자살 사건이 연달아 벌어진다. 주인공 더글라스 홀도 이 회사의 개발자다. 그는 이 모든 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한 끝에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도 컴퓨터 시뮬레이션 세계의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런 설정은 지금이야 온갖 영화와 소설에서 반복돼 새로울 게 없는 클리셰지만, <시뮬라크론 3>가 처음 발표된 1963년까지만 해도 신선한 발상이었다. 파스빈더는 이 이야기를 먼 미래가 아닌 1973년, 독일의 현재를 배경으로 풀어간다. 파스빈더가 각색한 대본에서 시뮬라크론 프로그램의 설정은 사기업이 아닌 독일 정부에서 개발했다는 것으로 바뀐다. 연구소의 이름은 사이버네틱스 및 미래 연구소(Institut für Kybernetik und Zukunftsforschung), 줄여서 IKZ라 불린다. IKZ의 시뮬레이션 세계는 정부 정책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해 구축된다. 어떤 정책의 효과를 최대 20년 뒤까지 예측할 수 있다. 시뮬레이션 세계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자신들이 위조 세계의 비트 행렬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다. 

 <선 위의 세계>가 방송되고 한 달 뒤인 1973년 11월 25일에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은 전국 운전 금지령을 내렸다. 석유 파동 때문이었다. 당시 1,300만 명에 달했던 자동차 소유자 대부분이 대중교통만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조치를 ‘에너지 보안법(Energiesicherungsgesetz)’이라고 한다. 이 시기의 아우토반 풍경은 당시 언론에서도 화제였다. 기묘하리만큼 평화로운 풍경이다. 사람을 채워 넣지 않은 시뮬라크론 환경처럼 보일 지경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불길한 거리 풍경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디지털 플랫폼에 과잉 의존해야 했던 시기였다. 지난 1년여에 걸쳐 전염병의 위세가 수그러들면서 온라인 바깥 생활을 회복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되돌아오고 있는 걸까? 

뉴스를 통해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속속들이 지켜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용자의 정보 소비 패턴을 간파한 알고리즘에 현혹당하기 쉬운 환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엄청난 양의 정보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진짜 사람과 진짜 세상을 향한 공감과 감화의 역량은 현저히 악화했다. 개중 유난히 중증인 이들을 어떤 멸칭으로 특정하든, 이것은 우리 시대 전체가 앓고 있는 집단적 증환(症幻)이다. 선 위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는 누구일까? 우린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오래된 SF 영화를 보며 생각해 봤다. 

국어국문학과 임태훈 교수.
국어국문학과 임태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