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기자 (webmaster@skkuw.com)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의 욕망은 단 하나, 푹 자고 싶은 욕망뿐이라고 한다. 그 군인들의 고생이 딱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부럽다. 불쾌하고 번잡한 마음과 근거 없는 생각의 홍수와 깨끗이 결별한 채 그저 수면만을 갈망하는 상태는, 정말 깨끗하고 단순해서 생각만으로도 상쾌해진다. 배불리 먹고 발 뻗고 자는 나는 마음이 번잡해서 온갖 욕망에 시달리고 불안에 떨며 또 하루 살기 위해 고민한다. 왜냐하면… 실존은 본질에 앞서니까.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목적, 기능, 의미 같은 건 없다. 인간은 그냥 존재한다. 존재하고자 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삶에 던져져 우연히 존재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느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본질 이전에 그냥 실존하는 존재자다.

본질이 없는 까닭에 인간은 자신에게 창조성을 부여받고, 자유를 선고받는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은 실존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또 인간은 실존을 향한 이 같은 도약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고.

나의 불안은, 인간의 불안은 우리가 선고받은 이 자유에서 온다. 자신의 운명을 맡길 절대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자유로서의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결정하기에 그 선택에 있어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우리는 자유에 의한 가능성 안에서 당도하지 않은 미래를 앞에 두고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 자유와 책임은 서로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면서 무한한 구속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적인 자유 안에서 우리는 불안하다. 본질이 없는 인간이 나를 선택하는 데 있어 그 어떤 의지할 곳 없이 나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자신 앞에서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만큼 살지 않을 이유도 없다. 자유를 불편한 짐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자기기만에 빠질 뿐이다. 나는 불안을 자유의 존재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삶에 던져진 건 우연이고 부조리일지 몰라도 미래는 온전히 내 몫이라는 뜻이겠다. 뭘 선택해야 하는지 정해지지 않았다면 내 선택이 정답이다. 내 삶의 정답이란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일 테고, 내가 선택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아아 불안을 이겨내야 한다. 아침나절의 몽롱한 꿈에서 깨어 선택을 해야 하고, 자신을 계속 미래로 던져야 한다. 인간은 삶에 던져졌으며 미래로 자신을 던지는 존재이다. 그게 바로 본질 없는 자의 실존 방식이다.

최다원(독문 21) 학우
최다원(독문 21)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