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기자 (webmaster@skkuw.com)

  술만 마시면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 있다. 수십 년 고통에 시달리던 아내가 여느 때처럼 폭행당한 어느 밤, 깊이 잠든 남편을 질식시킨다. 대다수 사람은 이중 감정을 느낀다. 아내의 행동이 명백히 잘못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남편의 오랜 행태에 대해 못지않게 분노가 치솟는다. 분노는 그런 결말을 당해도 싸다고 아내의 행동을 옹호하는 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부정의에 대해 치솟는 분노의 감정, 이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티모스(θυμός)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분노감이 정의 실현을 위해 대단히 중요함을, 동시에 그것이 이성에 의해 적절히 제어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즉각적인 분노감이 옳고 그름을 판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때, 어느 정도,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향해 분(憤)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이성은 헤아릴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는 더 큰 악과 부정의를 불러올 수 있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로 침입하여 유아를 포함한 민간인을 무참히 살해하거나 인질로 납치하였다. 이스라엘은 보복을 감행했다. 결과적으로 수천의 민간인 살상을 포함한 참혹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마스가 먼저 가공할 만한 악행을 저질렀고, 이스라엘이 이를 응징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이렇게 보면 하마스의 폭력에 분노하면서 이스라엘의 폭력을 옹호하기 쉬워진다. 이스라엘도 무고한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살상했지만, 이는 숨은 하마스의 공격 과정에서 벌어진 ‘부수적 피해’다. 이렇게 민간인 희생마저 정당화된다.

  어느 시민단체는 팔레스타인을 옹호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많은 이들이 비난했다. 하마스의 테러를 확인하고도 어떻게 그들을 옹호할 수 있냐고. 하지만 아마도 그 단체는 이-팔 분쟁을 위 사례와 유사하게 해석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아내에, 이스라엘은 남편에 대입된다. 하마스의 테러만이 아니라 그것이 표출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야 한다. 아랍인이 살던 땅에 유대인이 이주해 와 자기 나라를 세우겠다고 주장하고 이에 서방이 동조했던 시절까지 거슬러 갈 필요도 없다. 바로 지금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점령자로서 네타냐후 정권은 책임이 있다. 이스라엘군은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팔레스타인 거주지를 철거하고 이에 저항하는 이들을 구금, 처형했다. 가자지구를 봉쇄하여 15년 넘게 연료, 전기, 수도, 식량, 식수 부족을 초래했다. 폭력 단체 제거라는 명분의 폭격은 언제나 민간인 살상을 동반했다. 모두 국제법 위반이다. 이런 오랜 억압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하마스의 테러를 낳았다. 수십 년간 가정폭력을 행사한 남편에 대한 분노가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일어나지 않는가.

  물론 분노로 인해 사리 분별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위 사례와 이-팔 분쟁 간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사태를 해결했던 아내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지적해야 하듯이 하마스의 테러 또한 부당하다고 지적해야만 한다. 분노가 하마스의 옹호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저 아내에 대한 비난은 저 남편에 대한 분노와 공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마스의 테러에 대한 비난은 이스라엘의 오랜 억압에 대한 분노와 공존할 수 있다. 정당한 분노의 감정을 부당한 방식으로 표출함으로써 얻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복수의 쾌감뿐이다. 폭력의 악순환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성적 폭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 미묘하고 은밀한 형태여서 그 피해가 즉각 확인되지 않거나 뇌리에서 쉽게 잊힌다. 둘째, 만성적 폭력의 행사자는 권력적 우위에 서서 폭력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위장하고 때로는 정의로운 것으로까지 둔갑시킨다. 그렇게 ‘정의로운’ 전쟁 신화가 쓰인다. 셋째, 오랜 폭력은 현실 일부로 통용된다. 맞는 아내, 맞는 아이가 정상 범주로 들어오고, 피지배자의 차별과 억압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진다.

  이 모두는 왜 하마스의 테러는 언론을 장식하면서 이스라엘의 오랜 폭력은 인지되지 못했던가를 설명한다. 또한, 왜 표면상 하마스의 테러로 촉발된 전쟁임에도 이스라엘의 만성적 폭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오직 그러한 관심만이 사태를 해결한다. 하마스를 폭력으로 진압해도 기존의 차별과 억압이 유지되면, 결국 또 다른 하마스를 낳게 된다.

 

철학과 설민 교수.
철학과 설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