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기자 (webmaster@skkuw.com)

오늘날 현대예술은 분명 가장 논란이 되는 뜨거운 화제 중 하나다. 사람들은 현대예술이 난해하기만 한 ‘그들만의 리그’이며, 희대의 사기극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현대예술은 결코 난해하지 않으며 ‘그들만의 리그’는 더더욱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현대예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현대인이지 않은가. 예술은 시대의 자화상이자 세계관의 반영이다. 현대예술을 이해함은 곧 우리 세계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일견 성의 없어 보이는 현대예술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이건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반응의 기저에는 어떤 것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념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예술의 본질이 존재하고, 그것을 갖춰야만 작품은 예술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내재적인 심오함 같은 것이 있을까?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 이 시대의 정론이다. 현대는 실재가 소멸한 시대이다. 신의 죽음, 이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실재와 본질에 대한 신념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실재와 본질의 종말은 곧 선험적인 의미의 부재다. 인간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실존하는 것임이 드러났다. 인간의 삶과 현실은 지극히 임의적인 것이었고 세계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현대예술은 바로 이러한 귀결로부터 출발한다. 예술의 재현 대상이었던 실재가 죽었으므로 세계를 모방해야 한다는 전통적 예술의 본질은 소멸한다. 그렇게 본질이 사라진 예술은 실존만 남는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실존주의의 제1 원칙으로 내세웠을 때 이는 인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무의미한 세계에서 예술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가 되어야만 가능하게 된다. 즉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어간다.

현대의 예술은 실재를 모방하는 과거의 임무로부터 해방되면서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절대적 진리로 간주되던 실재가 몰락하면서 예술의 주제는 더 이상 거창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어떠한 것이든 작품의 주제로 가능해지면서 현대예술은 주제보다 표현이 중시된다. 작품의 훌륭함이 내용 자체보단 그것을 얼마나 독창적이고 심미적으로 표현하는지에 의해 결정되면서, 어떤 주제를 담아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예술의 새로운 방향이 되었다.

나아가, 주제가 절대적이지 않고 임의적이라는 것은 작품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의미는 세계에 스스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부여하는 무엇이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각자의 자의적인 의미 부여가 있을 뿐이다. 감상자가 부여한 의미와 작가가 부여한 의미가 서로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감상자의 자율적 사유를 촉진하는 계기이자 체험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은 공부해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예술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작품 속 작가의 의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가 그것을 파악해야 한다는 착오에 기인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해석의 주도권은 작가에게서 감상자로 이전되었으며, 작품은 우리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그러니 작품 앞에서 작가의 의도를 묻지 말고 당신 자신을 믿어라. 작품은 온전히 감상하는 당신의 몫이다.

강신승(국문21)  학우.
강신승(국문21)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