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정예본 기자 (nobey@skkuw.com)

학보사를 생각하는 기자는 있지만 기자를 생각하는 학보사는 없다. 학보사 기자로 활동한 1년 반, 기억에 뚜렷하게 남는 기간은 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느낀 소회다. 격주마다 찍혀 나오는 지면 아래 기자 개개인은 흐려진다. 어쩌면 기자들은 학보사를 구성하는 톱니바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명이라도 빠지면 제대로 굴러가질 않으니. 그만큼 기자 개인에게 책임감이 요구되는 곳이다.

책임감의 근원지는 기자마다 다를 것이다. 투입되는 나 자신의 노력에, 함께 고민을 거듭하는 타 기자의 마음에,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서투르게 넣는 취재 요청 메일에, 지면을 넘기는 독자에게. 발간을 마무리하는 소회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최근 들어 깨달은 사실이 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기사를 쓰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학보사는 기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신문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당연한 소리라 하겠지만 몸소 깨닫는 데는 오래도 걸렸다.

수습기자 시절 업로드한 웹기사로 시작해, 보도부 준정기자로서 8번의 발간을 거치고 보도부 부서장으로 또다시 8번의 발간을 거치면서 매번 나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기사가 발간되고 나면 도무지 읽어볼 수가 없었다. 지면의 한구석을 차지한 내 기사가 너무도 볼품없어 보일 것만 같았다. 내가 내 기사를 읽기 두려워했던 이유가 정말로 무엇이었는지 지금에서야 되짚어보자면… 결국 나는 내 기사를 ‘나의 기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기사는 나의 성과, 어떠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말장난 같지만 돌이켜보면 큰 실수 같기도 하다.

1716호에 실린 학생 공간 이전 기사를 쓸 때 신문사에서 이틀 밤을 내리 샌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만큼 고단한 밤이었지만 이상하게 머리는 맑았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나의 기사에서 조금이나마 탈피하는 경험을 한 게 아닐까. 신문사 밖의 누군가, 타인의 목소리를 위한 기사. 난 그제야 제 기능을 하는 기사를 썼던 것 같다. 결국 기사 쓰기는 의식적이고 이타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지면을 만들어내는 나의 노력과 성취감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서 멀어지는 고행을 겪어야만 한다. 더욱더 냉철하고 기민해져야만 하는 것이 기사 쓰기다.

올해의 마지막 발간이다. 내가 톱니바퀴 중 하나로서 역할을 충분히 했는지는 모르겠다. 충분히 이타적이었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타적일 것을 주장하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을 늘어놓는 것도 내가 여전히 이기적이라는 사실의 반증이겠다. 그렇지만 결국엔 내 이름을 달고 실리는 취재 후기이기에 이기적인 고백 하나를 남기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학보사의 위상이든, 지면이든, 독자든, 모든 걸 차치하고서 나는 성대신문을 생각했던 것 같다.

정예본 기자
정예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