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to be actor
이예원(미디어 20)
프롤로그
앵커: 오늘의 뉴스입니다. 연예부 기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최근 AI 기술로 등장하게 된 안드로이드 “루시아”의 데뷔로 연예계가 떠들씩한데요, 세계 최초 인간의 외관과 기능을 완벽에 가깝게 구현해 낸 안드로이드 루시아는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루시아는 김윤희 작가의 신작 드라마 작품의 주연으로 발탁되어 대중들의 더 큰 관심을 끌었는데요...
뉴스 소리, 점점 작아진다.
S#1. 대표실
해수: 말도 안 돼요. 이 작품 주연, 제가 맡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이건 사전에 없던 얘기잖아요.
대표: 어쩔 수 없어. 이미 위에서 회의 다 마치고 나온 결론이야.
해수: 나 참. 대중들이 고철덩이가 연기하는거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네요. 대체 대중들을 뭘로 보는 거에요? 시청률은 좋겠네요. 다른 의미로.
대표: 비꼬지 마.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힘들지 몰라도 루시아는 달라. 이제껏 나왔던 모방형 안드로이드와는 비교 대상이 안 돼.
해수: 아. 그 고철 이름이 루시아에요? 이름은 또 언제 지어줬대.
대표: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다시피 이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해수: 대표님. 저한테 미안하긴 하세요? 이런 식으로 역할 줬다가 뺏는 건 이례적인 일이에요. 심지어 사전에 얘기 하나 없으셨잖아요.
대표: 물론 미안하게 생각하지.
해수: 그래서. 일방적인 통보인가요?
대표: ...
해수: 제가 바꿀 수 있는 건 없고요?
대표, 침묵한다.
해수: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해수, 대표실 문을 박차고 나온다.
S#2. 연습실
태이: 야. 뉴스 봤냐? 해수선배 영화 주연자리에서 나가리 된 거.
연우: 야 말조심해. 누가 들을라.
태이: 뭘. 내가 틀린 말 했냐? 근데 어떡하냐. 해수 선배 김윤희 작가님 신작 출연 결정됐을 때 엄청 좋아하던데.
연우: 그니까. 해수언니 김윤희 작가님 팬이잖아.
이 때, 해수가 들어온다. 연습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연우: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언니. 괜찮아요?
해수: 괜찮겠냐? 열 받아 미쳐버릴 것 같아. 뭔 이런 경우가 다 있냐.
연우: 그니까요. 저도 처음에 기사 보고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해수: 나는 오죽하겠니.
태이: 어떻게 된 거에요?
해수: 몰라. 루시안지 러시안지 무슨 AI 개발했다고 하루아침에 배역 바꿔버린 거 있지. 나 이 작품 출연하겠다고 하반기 작품 다 거절했단 말이야.
연우와 태이는 해수를 위로한다.
해수: 너네는 화나지도 않냐?
연우: 뭐가요?
해수: 지금 이 상황이.
태이: 당연히 답답하죠. 가뜩이나 시민들은 일자리 없다고 징징대는데, 연예계까지 AI가 자리를 꿰찰지 누가 알았겠어요?
연우: 그니까. 안그래도 배역 오디션 빡센데 더 빡세지게 생겼어.
해수: 말이 안돼. 단단히 잘못됐어. 세상이 우리를 대상으로 트루먼쇼를 하고 있나?
태이: 그러니까요. 상도덕이 있지.
해수: 기계가 인간 흉내를 낸다는 게 인간의 감정까지 따라하겠다는 말이었어?
연우: 언니 이거 봐봐요.
연우, 휴대폰을 켜 해수에게 보여준다. 휴대폰에는 루시아의 데뷔 쇼케이스가 방영된다.
루시아: 반갑습니다. 루시아입니다. 공식적으로 인사를 올리게 된 건 오늘이 처음인데요, 떨리기도 하고, 또 기대도 됩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해수: 아으 지랄을 한다.
연우: (해수의 입을 틀어막으며) 언니 말. 말좀 예쁘게 하자.
해수: 나 먼저 간다.
태이: 누나 조심히 가요.
S#3. 해수의 방
방에는 대본집과 각본 종이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다. 해수, 바닥에 떨어진 대본 한 장을 들고 중얼거린다.
해수: (감정을 잡고) ...아니에요. 난 내가 하는 말을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내 말을 듣지 못하는 거예요. 이젠 신하고의 거리가 너무 멀어요. 당신의 주름살, 그 달변 그 큰 배를 가지고 들어올 수 없는 나라에서 내가 당신에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 나는 웃고 있어요. 크레온, 불현듯 당신이 열다섯 난 아이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스워요. 무엇이든 만능하다고 믿는 그 모습. 인생은 당신에게 그 얼굴의 잔주름과 몸뚱이의 비계만을 가져다주었을 뿐이요. 왜 말을 못하게 하죠?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 그 두 눈에 써 있는데요. 내가 옳다는 것을 알면서 당신은 그것을 고백하지 않아요. 이 순간에 당신의 행복을 뼈다귀처럼 움켜잡느라... 당신네들의 그 행복에 나는 욕지기가 나요. 어떤 짓을 해서든지 눈에 띄는 대로 핥아먹는 개 같아요. 겨우 욕심껏 바라봤자 이건 평범한 요행에 불과해요! 난 전부를 원해요. 이제 곧 완전한 전체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거절해요. 만일 삶이 두려워하고 거짓말하고 타협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만일 삶이 자유로울 수가 없고 후회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해요.
해수: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평생을 연기만 해 왔는데 인간도 아닌 기계한테 배역을 뺏겨. 무슨 이런 경우를 다 봤나.
선반 위, 해수 뒤로 빼곡히 차있는 연기대상 트로피들이 반짝인다.
S#4. 대표실
빗소리가 들린다. 해수, 대표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다. 대표실에는 루시아와 대표, 매니저가 앉아있다.
해수: 안녕하세요 대표님. 어머, 이분 실물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대표: 인사해. 이 친구가 바로 루시아야.
해수: 반가워요. 해수라고 해요. 오늘 비 오던데, 오면서 녹은 안슬으셨어요?
대표: 해수. 말 조심해. 루시아는 인간의 감정을 완벽에 가깝게 따라하고, 분석하고, 표현해낼 수 있는 인간에 가장 가까운 산물이야. 이 친구도 너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다 안다고.
해수: 대표님이 방금 본인 말로 말하셨네요. 인간에 가장 가까운 산물. 아무리 닮아도 인간이 될 수 없다고요 쟤는. 그저 기계에 불과한-
대표: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잖아.
해수: 대표님. 제가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해야 후련하실까요?
대표: 말 조심하라고 했어. 다 듣고 알아듣는다니까.
해수: 아. 맞다. 그렇죠.
해수는 루시아한테 다가간다. 가까이서 본 루시아는 더욱 실감나는 인간 형태를 띄고 있어 육안으로는 인간과 구분하기 어렵다.
해수: 반가워.
루시아: 반가워요.
해수: 너 설마 지금 내가 진짜 반가워서 반갑다고 하는 것 같아?
루시아는 침묵한다.
해수: (루시아를 잠시 관찰하더니) ...와. 확실히 진짜 같긴 하다. 대표님. 그쵸? 그냥 사람보다 더 사람같은데 얘.
해수는 루시아를 곰곰이 살펴보다 이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해수: 와. 살다 기계랑 기싸움을 다 해보네. 대표님, 저 가볼게요.
해수,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간다.
S#5. 해수의 방
해수의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온다.
진우: 해수. 괜찮아?
해수: 괜찮겠냐? 마음 같아서는 회사 찾아가서 깽판이라도 치고 싶어.
진우: 맥주나 한잔 할까?
해수: 좋지.
S#6. 늦은 밤, 공원
진우와 해수는 공터 앞 벤치에서 만난다. 해수의 손에는 맥주 두 캔이 들려있다.
해수: 짜잔~
진우: 술 끊는다며.
해수: 그걸 믿니.
해수: (맥주를 따며) 글은 잘 써져?
진우: 아니. 사실상 이쪽도 끝났지.
해수: 하긴.
해수랑 진우는 건배를 하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다.
해수: 있잖아, 나. 한창 기술이 발전하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는 분야는 엔터계랑 예술 분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자리 없다고 거리에서 한창 시위할 때도 내 일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더 와닿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매표소에 사람 대신 자동매표소가 들어서고, 알바생 대신 키오스크가 들어올 때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사실 오히려 편리하다고 생각했거든. ..지금 생각하니 나 완전 소시민이었네.
진우: 그럴 수 있지.
해수: 근데 이건 좀 아니지 않냐. 기계가 아무리 오차가 없고 완벽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야. 우리가 하는 일이 뭐지?
진우: 나는 글을 쓰고, 너는 연기를 하지.
해수: 그치. 너는 글을 쓸 때 무슨 생각으로 써?
진우: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냥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쓰는 것 같은데?
해수: 요즘 기계가 글도 쓴다며. 그거 보면 어때?
진우: 말도 마. 사람 뺨치게 잘 써. 가끔 보면 경이롭다니까? 요즘은 예전 인공지능 특유의 어색한 느낌도 없어. 전 세계 수백개의 데이터를 다 수집해서 기승전결, 글의 구성, 서론, 본론, 결론 다 학습하고 반영해서 쓰니까 인간인 내가 봐도 완벽해.
해수: 근데 난 그런 글은 가짜라고 생각한다?
진우: 왜?
해수: 본디 글은 인류학적 삶에 대해 고찰하고, 또 고뇌하고 쓰여져야 하는데 걔네는 그냥 기존 글의 데이터들을 토대로 모방을 할 뿐인 거잖아.
진우: 응.
해수: 비슷한 예시로 연기도 마찬가지. 넌 감정이 학습되는 거라고 생각해?
진우: 아니지.
해수: 그렇다니까.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감정을 학습한다니. 이처럼 모순적일 수가.
진우와 해수 사이에는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진우: 그럼. 이제 어떻게 할거야?
해수: 나. 공론화를 하려고.
진우: 공론화?
해수: 회사를 상대로, 세상을 상대로. 솔직히 쫄리긴 한데,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 하지 않겠냐.
진우: 근데 이미 캐스팅 발표 났잖아. 바뀐 것까지.
해수: 맞아. 대표님은 그냥 원만한 합의 하에 캐스팅 변경했다고 오피셜 띄우겠다는데. 내가 다른 소리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진우: 폭로네 완전.
해수: 그치. 바로 그거야. 대표 뒤에 무슨 배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긴 한데.. 난 뒤는 안 봐. 오늘만 살 거고. (감탄하며) 와, 나 방금 완전 누아르 영화 주인공 대사같았다. 인정?
진우: 인정. 인정.
해수: 기계에 잠식된 세계라니. SF장르도 아니고 세상이 무슨 영화보다 더 영화같네.
진우: 근데 너 괜찮겠어?
해수: 뭐가.
진우: 너처럼 파급력 있는 애가 인터넷에 그런 글을 올리면 어떤 형태로는 변화가 들이닥칠 텐데. 하물며 회사에서 널 퇴출시킬 수도 있어. 그럼 앞으로 연기 어떻게 하게?
해수: 그건 좀 무섭긴 하다. 나 가진 게 이것밖에 없는데.
진우: 정 일할 곳 없으면 우리집 전담 기사 도우미로 취직은 시켜줄게.
해수: 이게 진짜.
진우와 해수는 투닥대며 웃는다.
S#7. 해수의 방
해수는 집에 돌아와서 약간은 알딸딸한 취기가 오른 상태로 노트북을 켠다. 잠시 고민하다 첫 줄을 적는다.
“IK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 변경 사건에 대해 폭로합니다.”
해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한 문장씩 천천히 써내려간다. 노트북 화면에 줄글이 한 줄씩 늘어날수록 해수의 타자 소리는 점점 커지고, 또 빨라진다.
해수: 업로드 완료!
해수가 쓴 글은 인터넷에서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한다. 여론은 복잡해져간다.
S#8. 엔터 회의실
대표: (전화통화를 하며) 네네. 당연하죠. 제가 잘 타일렀는데... 죄송합니다. 잘 설득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그 친구가 워낙 자존심이 세지 않습니까? 아무리 말해도 통 듣질 않으니 원. 여론도 지금 급변하고 있다구요. 그 친구가 연기력이 탁월하다고 하긴 하지만.. 잠깐. 잠시만요. PD님. 뭐라구요? 아. 지금 이 사태를 또다른 소재로 이용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만... 과연 괜찮을까요? 아니, 의심하는 건 아니고... 네.. 네. 제가 해수랑 잘 얘기 해보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지고, 대표는 한숨을 내쉰다.
S#9. 오디션 프로그램 세트장
오디션은 공개오디션, 관객 참여형으로 진행된다. (문자 투표는 객석 리모콘, 혹은 휴대폰 문자 투표로 진행한다) 무대는 오디션 스테이지로 바뀌고, 조명은 화려해진다. 해수와 루시아는 스테이지 뒤쪽에 서있다.
사회자: 반갑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여러분! 놀라지 마시구요. 여기는 여러분들의 참여가 필요한 생방송 공개 오디션장입니다. 김윤희 작가의 새 작품 주인공 배역을 당신의 손으로 뽑는다! 공개 배역 오디션 프로그램 “Born to be actor!”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시그니처 사인을 하며) 액션 - 큐! 프로그램 진행은 간단합니다. 인간과 학습된 안드로이드가 무작위로 스크립트를 받게 됩니다.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어느 대본을 받을 지는 랜덤입니다. 두 배우는 그 스크립트를 각자 해석하고 읽겠죠. 여러분들이. 대중들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봤을 때 가장 호소력 짙고- 마음을 울리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에게 여러분들의 소중한 한 표를 던져주시면 됩니다. 문자 투표는 #02316으로 숫자 1 혹은 해수, 숫자 2 혹은 루시아를 적어 보내주세요. 문자 투표는 건당 100원이며, 중복 불가한 점 인지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액션 – 큐 !
사회자는 스크립트가 든 상자를 가져온다.
사회자: 첫번째 미션입니다. 첫 번째 미션은 지정독백 대사인데요, 무작위로 뽑겠습니다.
해수와 루시아는 각각 하나씩 뽑는다.
사회자: 자! 두 배우가 스크립트를 뽑았습니다. 해수 배우는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뽑았고, 루시아 배우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을 뽑았습니다. 자 어떤 연기를 선보일지 벌써 기대가 되는데요, 준비되시는 대로 각자 해석한 연기를 뽐내주시면 되겠습니다!
해수와 루시아는 스크립트를 보고 중얼거리며 각자 해석하기에 바쁘다.
사회자: 해수 배우 먼저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해수: 그래도 그쪽은 진짜 열심히 살았네요. 나는 자신도 없고,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내가 처음 몇 번 빼놓고는 방송국에 지원서 낸 적도 없다? 그게 몇 번 떨어지고 나니까 내가 어느 정돈지 감이 오더라고. 면접 볼 때도 면접관이 나한테도 물어보긴 하는데, 이게 예의상 물어보는 건지 아닌지 알겠더라고. 될 만한 애들한테는 일단 웃어. 걔네들이 뭔 얘기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런데 나는 내가 봐도 그 정도는 아니야. 좀 후져. 그런데 또 그거를 인정하는 게 너무 힘들어. 왜? 나는 내가 너무 애틋하거든. 나라는 애가 제발 좀 잘됐으면 좋겠는데, 근데 애가 또 좀, 후져. 이게 아닌 거는 확실히 알겠는데, 그런데 또 이걸 버릴 용기는 없는 거야. 이거를 버리면 내가 또 다른 꿈을 꿔야 하는데, 그 꿈을 또 못 이룰까 봐 겁이 나.
이어서 루시아가 대사를 읽는다.
루시아: 저 외국가요. 먼데로, 오래. 엄마 만났어요. 그렇게 말하지마세요. 후회 안하세요? 매일 엄마 때린거, 나 때린거. 아버지, 이제 아버지 안할게요. 나도 자식안하고. 여기서 나오지마세요. 실수로라도 나오지마세요. 아버지 만나면 엄마 맞은만큼, 나 맞은만큼, 하루동안 다 때려줄거에요. 그 얘기 해주고 싶어서 왔어요. 꼭 해야될 것 같아서. 그냥 거기서 죽으라고, 엄마 옆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내가 가만히 안 놔둘테니까.
해수: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뭘 안다고 뽑아도 하필 저 대사를 뽑았대.
사회자: 와, 정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두 배우 모두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는데요, 2분간 투표 진행 후 바로 두 번째 미션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문자 투표는 #02316으로 숫자 1 혹은 해수, 숫자 2 혹은 루시아를 적어 보내주시면 됩니다. 문자 투표는 건당 100원이며, 중복 불가합니다!
문자 투표 효과음이 스테이지 곳곳에서 울려퍼진다. 무대 배경에는 해수와 루시아의 투표율이 실시간으로 올라간다.
사회자: 두 번째 미션은 자유연기입니다! 쟁쟁해서 아직 투표를 하지 못하신 분들은 두 번째 미션을 보고 투표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이번 자유연기 미션은 조금 독특하게 이어지는데요, 각자 가상의 인물과 가상의 상황을 즉석에서 만들어 상대 배우에게 보여주시면 됩니다. 상대 배우는 이 연기가 어떤 상황의 어떤 감정인지 해석해주시면 되고요. 바로 이어가겠습니다. 액션-큐!
해수: (밝아진 표정으로 관객석을 보며) ..이 자리에 설 수 있어서 너무 영광이에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 그리고 저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준 주모님, 진우, 동료들, 매니저님, 대표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 드리고 싶어요.
방송작가: (스테이지 뒤에서) 해수 배우 지금 하는 연기 저거 작년 연기대상 소감문 같은데요?
PD: 그러게?
해수: 제가 올해로 연기하는 것이 17년째인데, 매년 연말 시상식 때마다 느끼는 게 있어요. 아, 연기하길 정말 잘했다, 나 지금 되게 행복하구나.
해수, 연기하다 말고 돌발행동을 보인다. 루시아에게 다가간다.
해수: 너. 내가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지 알아?
루시아: ..기뻐보여요.
해수: 너, 사람이 기쁠 때 그냥 아. 기쁘다. 라고만 느끼는 줄 알아?
루시아: ...
해수: 입이 있으면 말을 좀 해봐. 머리가 있으면 감정을 좀 느껴보라고. 기쁨을 너가 0~100까지 입력하고, 정도에 따라 수치를 구현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땡. 전혀 아냐. 틀렸어. 그냥 넌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기쁨, 환희, 전율, 즐거움, 낙, 쾌락, 희열, 행복, 고양. 이 단어마다 저마다의 감정이 조금씩 달라. 구별 가능해? 기쁨은 기쁘다-할 때 기쁜 감각이고, 환희는 그것보다 조금 더 밝고 붕-뜨는 느낌. 전율은 기쁘다 못해 짜릿한 감각. 손 끝과 발이 저릴 정도로 아린 감각이야. 너 이런 감정들, 직접 느껴본 적 있어? 구분할 수 있어? 지금 내가 무슨 심정인지 이해는 가?
관객석과 프로그램 관계자들, 웅성댄다.
PD: 하. 씨. 이거 생방송인데. 방송사고 제대로 났네.
방송작가: 이건 시나리오에 없던 건데. 어. 잠시만요 PD님.
해수: 한국말도 아, 어 따라 조금씩 다른데 너가 뭘 어떻게 따라하겠다는거야 따라하긴. 내 연기를 단순히 기쁘다-이 한 단어로 설명되는 줄 알아? 분석하는 것부터 글러먹었어 너는. 감정은 느끼는거지 학습하고 흉내내는게 아니라고..
해수, 감정이 격양된 나머지 울컥해 말을 하다 멈춘다. 오디션 스테이지, 조용해진다. 적막 속 띠링-하고 투표 소리가 올라가는 효과음이 들린다. 다시 조용해진다. 정적이 길어진다.
해수: ..이상으로 자유연기를 마치겠습니다.
해수,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스테이지 공기는 조용하다. 잠깐의 정적 후, 투표 소리가 점점 가속 붙듯이 빨라진다. 투표 효과음은 계속해서 울린다. 해수의 연기대상 시상식 장면과 오디션 스테이지 장면은 같은 구도에서 교차되며 겹쳐 보인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