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기자 (webmaster@skkuw.com)

사라지는 연습1

차서영(연기예술 20)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를 뒤흔드는 작품들은 절정의 순간에 바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왜 중요한가.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덕분에 세계는 잠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서문에서

※ 해당 대본은 본래 1인 다역의 1인극으로 진행하는 것을 목표로 창작되었다. 

불가피한 경우, {내레이터, 배우, 여자, 낯선사람} {연출가} 로 배역을 나누어 배우가 1인 다역을 수행하는 2인극으로 진행할 수 있다. 

 

1. <암전>

-내레이터

-여자

블랙박스 형태의 공연장. 무대에서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내레이터:     (지문을 읽듯) 블랙박스 형태의 공연장.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공연 중 배우는 눈발이 날리는 산에 도착한다. 배우가 직접 입으로 바람 부는 소리를 낸다. 산에 자리를 잡고 눕는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 위에 누워있다.

배우는 입으로 직접 바람 부는 소리를 낸다. 배우 자리에 눕는다.

내레이터:    신원 미상의 여자. 눈 속에서 한 가지를 기억해 낸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읽는다. 편지다. 

배우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읽는다.

여자:        그동안 많은 죄책감을 느껴왔습니다.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온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죽을까 봐 걱정했던. 엄마는 몇 번이나 시도를 들켰습니다. 어린 딸이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요? 무의식적으로 감각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엄마가 딸을 영원히 버리게 된 날, 아빠가 말했습니다.

(아빠의 목소리를 따라 하며) “사실 네 엄마는 살인자란다.”

여자:         증오스러웠습니다. 사실 아무도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부모님은 매년 제사를 지냈습니다. 

여자:        엄마는 자신을 살인자라고 이야기했고요.

사이.

여자: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죽이는 것은 죄인가요? 

사이.

여자:         어느 날 내게도 생명이 찾아왔습니다. 

여자: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내가 너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까?

여자는 태동을 느낀다. 참을 수 없다는 듯 양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쥐어짜듯 비틀기 시작한다. 하나의 줄로 연결된 두 존재는 이 격렬한 몸부림을 공유한다.  

여자:         저는 이 굴레를 끊어내고 싶습니다. 

내래이터는 다시 편지를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여자가 있던 자리에서 몇 걸음 멀어진다. 

내레이터:     여자가 입덧을 하는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이.

내레이터:     여전히 무대 위에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내레이터는 여자가 있던 자리로 서서이 다가간다. 흰 천을 덮는다. 

배우가 내레이터를 연기하고 있으니, 현재 여자의 자리는 비어있는 상태다. 

빈 무대에 흰 천. 

극중극의 암전.  

연극의 막이 내린다. 

 

2. <연극이 끝나고>

-배우

-연출가

웅성웅성 술집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온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 뒤풀이를 위해 모여있다.

사람들 짠. 술잔을 부딪히는 소리. 

 

배우:         그래서,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연출가:         연출가의 엄마.

배우:         이 장면에서 난 미래의 배우 시점인 내레이터로 연기를 해야해 아니면,         여자를 연기해? 여자를 연기하는 배우의 존재를 자각하면서 연기했으면         좋겠어?

연출가:         그건 같이 생각해보자. 

연출:        난 너가 미래의 배우 시점인 내레이터로 연기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레이터를 할 때에는 여자를 연기하던 너의 존재는 잊었으면 좋겠고.             예를 들면...

배우:        말 끊어서 미안한데, 그게 구별이 갈까?         

사이.

연출:        이미 말했지만 우리 공연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다만 난 빈 공간에 이미 무수히 지나갔을, 우리를 스쳐갔을 사람들을 담으려         한다는 것을 관객이 느끼길 바라. 

연출:        오늘 마지막 장면 정말 좋았어. 너가 감각하는 방향을 믿고 가도 좋을         것 같아.

 

사람들이 술잔을 다시 부딪친다.

연출가:        있잖아. 오늘 공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 얘기는 모두에게             발화되면서 내 얘기가 아니게 된다고. 어떤 상처도, 어떤 슬픔도. 무대에선        나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되는 거야. 그렇게 슬픔을 쪼개고 싶었어. 

        눈송이처럼 아주    작은 입자로.

배우:        손에 닿으면 녹아서 사라지게?

연출가:        응. 잘 아네. 

배우:         오늘 공연 본 사람들이 너 얘기냐고 묻더라.

연출가:         내가 글을 쓰고 공연을 한다고 해서 그걸 내 얘기냐고 묻는 발상은 뭐랄까.        참 재밌어. 

 

3. <극장>

-내레이터

-연출가

요약: 연출가는 연극에서 자신의 장례식을 연출하고 싶다고 말한다. 연출가는 자신의 장례식을 공연에서 올려줄 수 있을지, 배우들은 이것이 공연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을 품는다.

내레이터는 오프닝 장면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큐브를 가져오고, 공간을 연습실로 전환한다. 

 

내레이터:     어느 날. 연출이 자신의 장례 장면을 구성해달라고 말했다. 

 

내레이터:    동의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살아있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라니.

내레이터:     이게 말이 되는가?

연출가:         내가 죽을 수는 없지만 내 장례를 상상해 보고 싶어. 

정확히 말하면 내 죽음. 

내레이터: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죽을 수는 없지만. 내 장례를 상상해 보고 싶어. 

정확히 말하면 내 죽음.  

연출가: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내가 어떻게 죽을지 상상해 봤거든. 

나는 스위스에 갈 거야. 나를 위해 마련된 파란색 집에 들어가서 약을 먹고,     영원한 안식에 빠져들 거야. 

연출가:        (발언을 끝내기 위해 상대방을 다독인다) 쉿. 걱정하지 마. 

연출가:        모든 것은 합법적으로 진행할게. 언제일지는 몰라. 그것만 정하면 돼.

4. <연습실>

-연출가

-내레이터

 

연출가:        분명 어떤 사람들은 내 결정이 윤리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연출가:         사람들은 이 결정이 윤리적인지 따지기 시작한다. 

연출가:         그래도 한번 해 보고 싶은데.

연출가:        shit!

연출가:         이미 다른 연극에서 한 적 있는 것은 아니겠지?        

연출가:         (결심한 듯 배우에게) 그래도 한번 해볼게요. 

연출가:        내 죽음을 무대에서 한번 보고 싶어. 그뿐이야. 

사이.

연출가:         여러분은 저를 위해 시를 하나 낭송해 주세요. 

연출가:         죽는 순간을 상상해 봤어요?     

연출가 자신의 상상 속으로 빠져든다. 

연출가:        난 눈이 와야해. 하얗게 눈이 오고. 나는 창밖으로 그걸 지켜보다가 

연출가:         함박눈이 소복하게 쌓인 땅에 첫 발을 딛는 거야. 차가운 기운에 살짝 얼었는지 뽀드득 소리가 나. 새하얗게 쌓인 눈을 밟고. 

연출가 말을 잠시 멈춘다. 정적 

배우는 연출가의 말을 몸으로 재현한다.

연출가:         눈을 한번 핥아.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배우는 눈을 한번 핥는다. 연출가는 상상을 끝내고 다시 대화 상태로 돌아온다.

연출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죽을지 결정했다느니 이런 말 하는 것이 

참 웃기지? 

연출가:         우리는 모두 언제 사라질지 몰라.

연출가:        최근에 진짜 죽을뻔 했다? 나 아직 살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됐어. 다만

연출가: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많잖아. 연습을 하려는 거야. 

사라지는 연습. 사라지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내 죽음 또한 받아들이는 것. 

연출가:         혹시 나 대신 연극에서 스위스에 있는 그 집에 가서 누워있어줄 수 있어?

연출가:         (배우가 거부하는 것에 반응하며 연출가가 배우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관객들은 배우가 거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연기잖아.

사이.

내레이터: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배우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만약 자세히 집중해서 듣는다면 배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배우:        어느 날. 그는. 무대에서. 나에게. 자신의 장례식을 진행해달라고             말했다. 

 

4. <연습1>

-연출가

-배우

-내레이터

연습실. 

공연 연습이 진행 중이다. 

배우는 목을 가다듬는다. 

배우는 연출을 애도하기 위한 시를 적절히 낭송할 방법을 연구한다. 

 

내레이터: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장례식을 진행할 테니, 나는 그저 시를 낭송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내레이터:    (지문을 읽듯) 배우가 시를 연습한다. 

배우:        (배우는 각자가 쓴 시의 첫 구절을 낭독한다. 최소 두 구절을 낭독한다.)

배우가 외운 부분을 떠올려보려 한다. 

내레이터:     시를 낭송하는 과정은 전혀 쉽지 않네요. 

배우:        이 느낌은 마치 기분 나쁜 꿈을 꾸고 일어난 듯한 상황과 비슷하다. 물론 나는 우리의 관계를 떠나 철저히 배우로서 공연에 접근하고 있다.  

만약 연출이 날 떠난다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한다. 하지만.

배우:        자꾸 극장의 상상은 현실로 연결된다. 분명 무대 위의 장례식인데. 그것을 아는데. 너의 죽음을 떠올리다 보면 … 

배우:        잠시만. 너 혹시 내가 잠시 시간을 갖자고 했던 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아니지?)

사이.

연출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내 장례식에는 모두가 춤을 췄으면 좋겠어요. 내가 사라지는 순간에 모두가 마음을 담아서. 내가 잘 가기를 빌어줬으면 좋겠어. 아냐 결국 떠난 사람은 알 길이 없으니까 곁에 영원히 있어달라고 빌어도 좋겠네요.

배우: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애도하죠?

연출가:         그냥 해 보는 거지.

배우:         사실 이게 어떻게 가능할지 상상이 가지는 않아요.

사이. 

내레이터:     여전히 모르겠다.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애도할 수 있을지는.

내레이터:    (관객들에게) 여러분은 죽음이 두려우세요? 

사이. 

내레이터:     그 외에 연출이 내게 요구한 것들은 다음과 같았다. 

사이.

연출가 의자 위로 올라간다. 

연출가:         도시에 제일 높은 곳에 혼자 올라가 봐요. 

연출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연출가:         각자 몸에 있는 흉터 사진을 보내줄 수 있어요?

연출가:         나한테는 기억 못하는 흉터가 있어요. 배에 있는 건데. 

가끔씩 꿈에 한 여자가 나타나서 나를 불러. 이렇게 

연출가:        (속삭인다) 안녕

연출가:        왠지 나 쌍둥이였던 것 같아.

사이.

연출가:        아 그리고 장례 방식은 말이지.

우주를 떠올리게 하는 듯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연출가:        2023년 (공연 날짜). 얼마 전, ‘우주장‘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출처는 유튜브  “1.4.F”(일 사 에프). 말 그대로 화장한 유골을 우주로 보내는 거다. 작은 민간 우주선에 담겨 우주를 떠도는 장례 방식. 물론. 지구 상공이나 달 표면 너머 우주 공간에도 갈 수 있다. 우주에 갔다가 지구에 재진입하면 유성처럼 타올라 별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난 심우주 항해장이 끌렸다. 영원히 우주를 떠돌며 여행하는 거다. 우주는 무한하니까… 근데 혹시 내가 그렇게 사라져버리면 내 영혼은 어디로 가게 될까? 우주 공간에서 유골이 된 내가 외로움을 느끼면 어떡하지? 

*실제로 창작진은 도시에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는다.

*배우에게 공연을 준비하다 의문들이 생기는 경우, 작가와 협의를 통해 대사를 추가할 수 있다. 

 

5. <그녀의 장례식1>

-내레이터

-연출가

 

내레이터:     연습이 진행되던 중 연출은 자리를 비웠습니다. 어쩌면 긴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출가는 떠나기 전 배우를 만난다. 

연출가:         내가 진짜 없어야 (실제 배우이름)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무대에서 진행되는 장례식 어딘가에서 꼭 지켜보고 있을게.

배우:        연기인 거 아는데, 너의 장례식을 올려달라는 말에… 

배우:        연기하는 순간순간이 너무 괴로워.

배우:        넌 내가 이렇게 힘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사이. 

배우:        이 역할을 나에게 부탁한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까?

연출가 무어라 대답하나. 이 읊조림은 배우에게 들리지 않는다.

연출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까?

연출가:         그 사람들의 눈동자는 어떨까? 세차게 흔들리고 있을까?

연출가:         눈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아 그러면 사람들이 오기 너무 힘들 것 같아. 

연출가:         죽음은 무슨 색인 것 같아?

배우:        네 죽음은 상상하기 어려워.

연출가:         무채색이려나. 

배우:        너는 지금 무대 위에 나를 세우고

배우:        무책임하게 떠나려 하고 있어.

연출가:         흰색? 검정색? 장례식에서 순백의 옷을 입고 있으면 느낌이 어떨까.    

배우:        지금 너가 떠나는 이유 말이야. 내가 생각하는 게...

연출가:         장례식에서 흘리는 눈물을 흰색이라고 할 수 있나.

배우:        맞아?

연출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배우:        도대체 이 물음이 무슨 의미가 있어?

배우:         난 도저히 모르겠어.

배우:        살아있는 누군가와 이별하는 상상을 할 수는 있지만, 이걸 무대에 올린다는         건 달라. 여전히 넌 이곳에. 내 앞에서 생생히 살아있는걸.

배우:        사라지고 싶다고 아름답게 말하지 마.

배우:        너 그냥 죽고싶은 거잖아.

배우:        난. 

배우:        아니다.

배우:        나는 지금 너가 나를 떠나겠다는 말을 내 몸으로 관통시켜 무대에 올려야해.         그걸 온몸으로 연습하는 게 나의 일이야. 어떻게 생각해?

배우:        지금이라도..

긴 침묵. 

    

6. <그녀의 장례식2>

-내레이터

요약: 장례식이 진행된다. 관객이 이 장면을 진짜 연출가의 장례식인지 이들이 준비한 연극 장면의 일부인지 헷갈려도 상관은 없다.

무대 위에서 장례식이 진행된다. (극중극의 장례식)

 

*장례식은 연극에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사실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 이전에 지나갔을 누군가, 그녀 안에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장례식일 수 있다. 

 

배우 무대장치를 옮겨와 장례식을 진행한다.

연출가가 원했을 법한 장례식의 모습이 펼쳐진다.

배우는 흰 옷을 입고 있다.

배우가 영정 사진 속 인물과 눈을 마주한다. 

배우 크게 웃는다. 

배우는 춤을 춘다. 

웃음 소리가 나는데 배우의 표정은 이미 오랫동안 울었던 것 같다. 

 

7. <기억2>

-연출가

-여자

연출가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장례식을 올리기 위해 대본을 쓰던 중 잠이 든다.

연출가의 꿈 속. 

 

여자:                 아이를 낳다 죽은 여자

            아이를 죽인 여자

        아이를 죽였다는 엄마를 바라보며 자라온 여자.    

                아빠를 증오하는 여자.

                아이를 낳고 싶은 여자.

            아빠에게 죽은 여동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죽은 언니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 모든 사실을 숨겨온 엄마가 밉다.

                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어릴때부터 엄마가 죽을까봐 걱정해왔다. 왤까? 

    그는 무의식적으로 감각할 수 있었다. 어느날 그녀의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죽어버리려던 날, 아빠에게 비밀을 듣게 된다. 

                그녀의 아빠는 그녀에게 증오심을 심어줬다.

        그녀의 엄마는 자신이 살인자이기 때문에, 더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실 아무도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것 아닌가?

    

                이 굴레는 꽤나 오래된 것이였다.

         이 나라에서는 많은 여자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사라져왔다. 

            그녀의 아빠에게도 여동생이 있었고, 그 전에도 누나가 있었고…         몸이 아팠던 아빠의 여동생은 이내 죽어버렸다. 

            아빠의 부모는 깊은 슬픔의 늪에 빠져들었다.

     아빠는 방치됐다. 아빠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이겨내고 싶어졌다. 

    이곳에 죄인은 없다. 아이를 죽이는 것은 죄인가? 그러나 태어나지 않은 생명이 태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죄라고 할 수 있는가?

                여자는 이 굴레를 끊어내고 싶어한다. 

            어느새 수박처럼 불어나기 시작하는 그녀의 배.

         그녀는 거북함을 느낀다.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입덧이 시작된 것 같다. 

    여자가 느껴온 죽음은 어떤 색깔일까?

            잃어버린 언니를 만난다면 우리를 그만 괴롭히라고 하고 싶다.

         나는 이것들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까?

연출가 꿈에서 깨어난다. 

연출가:         넌 누구야?

연출가:        왜 자꾸 꿈에 나타나는 거야. 

여자:         예전에는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자가 많았대.

여자:         여자한테 아이는 뭘까.

여자:         (상대방에게) 넌 결혼이 하고 싶어?

여자:         아이를 가지면 어떤 느낌일까?

여자:         너 안에 새로운 생명체가 살아간다는 것이 어떨 것 같아?

여자:         내가 책임져야 할 존재가 있다면 조금 더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사이. 

연출가:         혹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언니가 있었던 게 아닐까?

연출가:         죽음을 상상해보고 싶어. 상상하고 싶지만 잘 안돼.

연출가:         무대에선 가능하지 않을까? 

사이. 

내레이터:     (아직 꿈에서 허덕이는 연출가를 바라보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많은 여자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사라져왔어요. 그녀의 아빠에게도 여동생이 있었고, 그전에도 누나가 있었고.. 몸이 아팠던 아빠의 여동생은 이내 죽어버렸지만요. 

암전. 

 

8. <연습2>

-연출가

-배우

연습실. 배우가 대본을 연습하고 있다.

 

배우:         (대본을 외우듯)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이 아름다움이 언제 사라질까 걱정해요. 그리고 자꾸 죽고 싶어져. 기쁨을 느끼는 만큼 이 정도의 기쁨이면 기꺼이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배우:         나 못하겠어.

연출가:        …

배우:         도저히 너의 죽음을 상상할 수가 없어. 싫어. 

연출가:         …

배우:         계속해야만 한다고?

연출가:         …

배우:         그만하고 싶어. 

연출가:         …

배우:        왜?

연출가:        …

배우:         그래야 하는 거야?

배우:         무엇때문에?

연출가:        (다른 질감의 소리) 이건 그냥 공연이잖아.

배우:         이게 실제 너의 장례식이라고 말할 것까진 없잖아. 

연출가:         (다른 질감의 소리) 우린 모두 떠나게 될 거야. 

연출가:        떠나는 연습을 해야 해.

연출가:         난 이번 공연을 통해 그걸 해보고 싶어.

사이.

배우:        너 혼자서만? 

불이 밝혀지고 관객석이 아닌 무대 위에 있는 관객들은 불빛을 받는 무대의 상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관객들에게 객석 앞이 보이지 않는다. 배우는 앞이 보이지 않는 객석으로 걸어 나간다. 

9. <흉터>

-배우 

 

내레이터:    빈 극장. 공연을 마친 배우는 객석에 혼자 남아있다. 공연을 마친 그의 몸에는 흉터가 하나 남았다. 

내레이터:     전화벨이 울린다.

내레이터:    따르릉. 따르릉.

??:         울었어?

배우:        응.

배우:         응?

??:        얼마나?

배우:         꽤 많이. 

배우:         그 집의 지붕은 아주 새하얬고, 눈이 왔어. 

??: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해. 고마워.

너 덕분이야. 혹시 나를 원망하고 있다면…

배우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다. 

 

10.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배우:        어제 무대에 올랐던 나는 공연이 끝나고 빈 극장에 앉아있다. 내가 공연을 했다고 말하지만 나 자신에게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저 내 몸에 공연을 준비하던 중 작은 흉터가 하나 남았을 뿐이다. 

배우 시를 낭송하기 시작한다. 연습 때와 달리 배우는 성공적으로 시를 낭송한다.

 

11. <장례식>

다시 무대로 돌아온 배우. 검은색 재킷을 챙겨 입는다. 

누구의 장례식인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연출가가 원했던 극 중의 장례식이 아닌 실제 장례식 장면이 진행된다.

영정사진. 국화꽃. 향과 초. 조촐한 빈소. 

배우 검은 자켓을 입고 등장한다. 

 

12. <술집에서의 짧은 대화>

-배우

-낯선 사람

여전히 검은 재킷을 입고 있는 배우가 술집으로 들어간다.

유쾌한 노래. 음악이 흘러나온다.

 

낯선 사람:    어디서 왔어요?

낯선 사람:    어디서 왔냐고요!

낯선 사람:    몇살이에요?

낯선 사람:    외국인이에요?

낯선 사람:    에휴 

배우:         그냥 춤이나 춰!!

배우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막춤을 춘다. 배우 춤을 추다가 쓰러진다.

배우가 움직임을 멈춘 상황에서 장면이 전환된다.

 

13. <길거리>

-내레이터

-배우

-낯선사람

 

내레이터:    배우가 반쯤 취해 길을 걸어간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배우는 그가 외로워 보인다 생각해 다가간다. 낯선 사람도 배우처럼 취한 듯하다. 그는 눈을 껌뻑이다 길거리에서 잠을 취하려 한다.  

배우:        이봐요 잠은 집에 가서 자요!

낯선사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씨팔 그 끔직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눈이 내린다.“ (한강 <흰> ‘눈송이들’, 54쪽)

 

사이. 

내레이터:    배우도 자신이 현재 매우 고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그가 본 낯선사람의 심정을 똑같이 느낀다. 

배우: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갔는지….

배우는 행인들을 바라본다. 

가로등 불빛(또는 자동차 전조등 or 경찰의 손전등 불빛)이 그에게 비춘다. 

온통 흰색으로 무대가 전환된다. 

배우는 입으로 바람 소리를 낸다. 

바람 소리 음향이 흘러나오고 이후 점차 커진다.

 

14. <눈보라>

-연출가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함박눈이 내린다. 연출가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에 있다.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을걸이를 흉내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위의 책)

 해당 문장을 장면으로 연출한다. 

 

나레이터: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연출가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연출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연출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연출가:        너는 언젠가 반드시 나를. 나를 잊을 거야. (‘네가 그랬으면 좋겠어‘) 

연출가:         아. ~ 죽고 싶었는데. 살고 싶어졌다. 

사이.

내레이터:     그녀가 바라본 눈송이의 입자는 그녀가 살아온 국가의 것보다 조금 더 굵었다. 어쩌면 결정의 모양이 소금 같다고 생각했다. 

내레이터:     그녀가 핥아보면 부드러울까? 조금 짜지 않을까? 생각한다.

*해당 장면에서 이 작품을 만들어가는 창작진은 자신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는 데에 이 장면의 목적을 두었으면 한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아름다운 것을 이야기해보자. 그런 것들을 뒤로하고 사라져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내레이터:    죽고싶을만큼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전 그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밤 하늘에 수놓인 별. 우리의 눈 앞에 보이는 저 빛나는 것은 사실 과거의 빛이라지요.

연출가가 바닥에 눕는다. 우주 공간을 표현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배우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가 누워있는 자세는 우주를 유영하는 듯 하다. 

무대에 반짝이는 조명이 별빛을 수놓은 것 처럼 보인다. 

녹음이 흘러나온다. 내레이터의 음성이다.   

 

*작품을 연습하며 해당 회차의 배우는 자신이 직접 쓴 시를 낭송한다.

음악이 듣고싶었던 그 날에

이어폰을 맞이할 귓구멍이 없어

그냥 걸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넉넉한 마음에 빵집 앞에 앉아

케잌을 구경하다 날카로운 그믐달에

그만 베인 적이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그렇게 해요

달팽이가 미끄러지는 길에

이정표를 만들어볼까 싶은 저녁 입니다

이왕이면 달콤한 사과로 글을 써 놓으려 해요

달콤함에 속아 경로를 이탈하세요

같이 누워요

푹신하게 추락하는 달팽이

다음에는 그렇게 해요

다음에는 그렇게 해요, 김윤후

하이얀 안개처럼 자욱히 머무르던 사람

하이얀 바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던 사람

하이얀 눈꽃처럼 서서히 사라지던 사람

 

닳고 닳은 몸뚱아리로 하이얀 눈물을 흘리며 

영웡히 기억되기를 바라던 사람

우주속을 유영하는 먼지처럼

하늘위를 가로지르는 새들처럼

어디서든 자유롭고 싶다던 그는

어느새 하이얀 눈송이가 되어

이내 사라지고 말았네

하이얀, 김현지

작고 가녀린 눈동자에서

수많은 의미가 담긴 눈물을 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은 그대로 사라졌다.

따뜻한 햇볕이 드는 창가에 눈사람을 두었다.

눈사람은 형체를 잃고 아름답게 녹아내려간다.

엄마는 머리카락과 먼지가 뒤엉킨 축축한 걸레로 그 물기를 닦았다.

그대로 사라졌다.

샤워를 하다가

벽에 달라붙은 수많은 눈방울을 바라보고는

엉엉 울었다.

나의 눈물은 비릿한 수돗물과 뒤섞여 사라졌다.

사라져가는 모든 순간에 네가 생각났다.

나도 그렇게 점점 사라져간다.

눈방울, 윤희지

 

*우리는 죽음에 가 닿으려고 하지만 영원히 실패할 것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암전.

15. <기억3>

-여자

-연출가

-내레이터

조명이 들어온다. 

연출가:    아주 어릴 때. 아빠한테 밤에 전화가 왔어. 

당신이 죽으면 웃으면서 춤을 춰달래. 

미친 것 같지 않아? 

연출가: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아빠 제발 그러지 마..” 하고 울다가. 

내레이터:    결국에는 알겠다고 했어. 웃으면서 춤을 추겠다고. 

 

내레이터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춤을 춘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레이터는 흐느적거리는 춤을 춘다. 조명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는 왜 혼자 극장에 남겨져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영원히 사라지는 연습을 시도한다.

*사라짐의 형태를 몸으로 구현한다. 

배우 관객과 눈을 맞춘다. 암전.

 

막.

차서영(연기예술 20) 학우.
차서영(연기예술 20)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