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기자 (webmaster@skkuw.com)

놀이의 시, 시의 공동체

주예은(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7기)

 

1. 위반에서 시작되는 놀이—놀이로서 가능성의 열림 
밤이 오고 있었다./모두 긴장하고 있었다./갑자기 뒷뜰에서 살구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낯선 거리에서 복면을 쓰고 

종이를 뿌리다가 돌아온 저녁, 우리는 /고우고우 스텝으로 저녁 식탁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일곱 마리 새끼를 물어 죽인 해피도 

우리를 따라 스텝을 밟고 있었다./아 별들이 모두 고우고우로 떨어지고 있었다./뒷뜰의 살구들도. 해피가 죽인 일곱 마리도.

우리들이 던지던 종이 조각도./별 스물 두 개도. 차례로 고우고우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고 있었다. 

--「스물 둘의 저녁 식사」전문, 『또 다른 별에서』 

김혜순의 시는 1970년대 중후반에 금지를 어기는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1976~1978년쯤에 쓴 이 시는 김혜순 시인이 실재로 스물두 살쯤에 썼던 시로, 낮에 복면을 쓰고 유인물을 뿌리다가 밤에 집으로 와서 죽은 것들을, 죽어가는 것들을 놀아주며 함께 고고-춤을 추는 모습이 상상된다. 

야간 통행 금지령으로 인해 낮과 밤은 철저하게 시간적으로 분리되고 사람이 처할 수 있는 장소가 또한 강제적으로 구별되었다. 밤이라는 또 다른 공간의 오기에 대한 불안함과 기대감이 모두를 긴장하게 한다. 그 기대의 원인은 1970년대 한국 젊은 청년들의 야생활, 즉 고고-춤을 추는 것이다. 고고-춤 금지령이 발포될 정도로 고고-춤은 1970년대 한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춤 문화이자 수많은 금지와 억압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청년들의 출구였다. 고고-춤의 열풍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고 이 시가 탄생한 1976~1978년에도 화자가 고우고우의 리듬을 타고 있다. 금지가 되었는데도 '퇴폐'한 춤을 춘다는 것은 청년들이 사회질서에 대한 위반이고 위조된 에덴을 깨트려 스스로 '하락'을 선택한 것이다.

금지를 위반하여 '우리'는 낮에 복면을 쓰고 자신의 삶을 은폐하며 밤에는 죽음과 함께 춤추는 잔치를 연다. '나'의 젊음이 죽어가는 이 지금이지만 '나'의 죽음으로서 살아온 22년이라는 시간이 이 춤에서 다시 살아난다. 죽은 동물들, 죽은 별들, 죽은 살구들이 '나'와 함께 이 고우고우의 스텝을 밟는다. 이때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 죽음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틈이 생기게 된다. 가면을 쓰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나'와 가면을 벗고 잡힐까봐 두려워하는 '나', 생기 없는 죽은 대낮과 뜨거운 잔치를 여는 밤, 그리고 일곱 마리 새끼를 죽였지만 '해피'란 이름을 가진 동물, 이 모든 것들이 전도되어 있지만 춤을 추는 동안에는 함께 출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것들이 함께하면서 같은 스텝을 밟고 '고우-고우'의 리듬 속에서 일체가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죽음 속에서 죽음의 리듬을 맞춰 살아있는 자의 움직임, 살아있는 세상의 춤을 추며 노는 것이다. 죽음과 함께 하는 이 춤을 출 때만 우리는 가면을 벗어 진정한 우리로 움직이게 되며 죽은 것들이 살아있는 형태로 돌아온다. 살구, 새끼동물과 '우리'의 생은 죽음의 놀이 속에서만 완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은 당시 고고-춤 금지령이 1972년에 반포되었지만 실제적으로 1980년대 초까지 여전히 인기 받았던 이유이었다. 목숨 걸고 노는 고우-고우의 스텝은 그 시대의 청년들에겐 죽어야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역설을 품긴다. 

고고-춤이 시에서 '고우고우'로 변형한 것은 춤의 현장에서 형성된 삶과 죽음의 공동체의 리듬을 생동감 있게 해준다. 사람의 동작을 표현할 때 신나고 빠른 박자의 고고-춤이 슬로 모션으로 변해 삶과 죽음의 조화로운 풍경과 끔찍한 우아함을 보여준다. 살구와 별의 떨어짐을 형용할 때 'Go-Go'로 그 속도감을 드러낸다. '우리'의 젊음과 생이 단호하게 여지없이 죽어가고 있는 현장에서 '우리'는 우아하게 스텝을 밟아 춤을 추는데, 공포와 절망과 자유의 심포니가 어울려지며 그 경쾌한 황홀함이 '고우-고우'의 리듬 속에서 최대화한다.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20대의 젊은 청춘들을 맞이하는 것은 유신헌법의 구속과 일련의 금지령이었다. 이에 맞서 시인은 위반과 이탈의 놀이를 선택했다. 이 놀이에서만 '나'는 지금-여기의 사회에서 특정한 기능을 하지 않고 의미를 실현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 자체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활동 속에서는 '나'의 참된 있음이 구현된다. 가면을 벗고 진정한 '나'라는 존재가 이 목적 없는 놀이 속에서 드러나며 찾아진다. 따라서 억압과 금지의 시대에 '나'는 좌절되거나 맹목적으로 선동되지 않고 놀이 속에서 '나'의 존재와 진실성을 드러나는 선택을 한 것이다.


2. 어머니의 놀이—놀이로서 여성의 연대
위반에서 시작된 놀이는 1980년대 중후반의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와 『어느 별의 지옥』에 와서 '어머니'의 놀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늘 파괴-생성-반복의 놀이를 진행한다. 스스로 비워서 죽이고 타자를 자신의 몸에 담아 새로운 세상을 출산한 후에 다시 처녀로, 즉 '과정의 초기'로 돌아온다. 이러한 '어머니'는 '놀이하는 자'로 명명할 수 있다. 놀이는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고, 반복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며 새로운 현재적 의미를 얻"기 때문에 자신의 고정불변에 대한 스스로의 파괴를 전제로 하고 늘 새롭게 변화하며 다시 시작하는 밀물과 썰물처럼 끝없이 경신하는 순환이다. '어머니'가 이 놀이를 통해 수없는 타자들에게 달려가 "시적 자아와 타자들의 변형된 정체성을 끊임없이 노정하려"고 하며 "자연은 자연으로서 그러하고, 모든 삼라만상은 삼라만상으로 그러할 수 있"게 해준다. '어머니'의 놀이로 '모성'은 원래대로 있게 할 수 있고, 모든 것들이 그것들로서 그러할 수 있게 된다. 타자를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게 해주며, '나'를 새롭게 변화된 '나'들로 증식시킨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반복됨으로써 나선형 순환의 길을 그리며, 늘 변화하고, 변화된 모습으로 놀이를 확장한다.

그러나 너 태어나 탯줄이 끊기고 /눈꺼풀이 떨어지고 /인큐베이터 속으로 너 떨어질 때 /강물은 다시 흘러내리고, 무덤들 검게 닫히고 /우리는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지./내 두 젖은 말라 비틀어지고 /텔레비전은 왕왕거리고, 창밖에선 클랙슨 소리 /요란했지. 너 배고파 우는 울음 소리와 함께 /산맥은 캄캄하게 돌아누워지.

--「解產」부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머니'의 파괴-생성-반복의 놀이에서 출산은 그 놀이가 회귀하는 지점이다. 산고를 겪고 있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들이 기존의 질서대로 행동하지 않고 모든 사건들이 순서를 거꾸로 발생하거나 한꺼번에 일어난다. 피, 눈물, 골수와 같은 액체가 흐르며 출산의 현장이 죽음의 열림과 함께 전개된다. 아이의 태어남과 동시에 모든 것들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어머니'는 여성적인 죽음의 공간에서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다. 

출산의 순간에 '나'는 어머니이자 아이이고, 출산을 통해서 '나'는 현실세계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놀이를 끝없이 즐기는 여성세계에서는 '아이'로서 놀이를 다시 펼치려고 한다. 출산이라는 물의 원두인 계곡과 같은 곳으로 '어머니'는 돌아와 다음 놀이의 반복을 준비한다. 

김혜순이 출산 시 직접 보았던 무의식의 반영을 담긴 「딸을 낳던 날의 기억」 중에서 '청천벽력./정전. 암흑천지.'라는 휴지(休止)로 이 순간적인 절대 암흑과 고요의 시간을 표현한다. 이것은 「解產」의 1행과 2행 중간의 공백 부분과 맞닿는다. 

어머니가 끊임없이 놀이를 새롭게 반복함으로써 비선형적인 세계가 탄생된다. 거울을 열고 들어가면 어머니, 외할머니 등 모든 어머니들과 만나는 것(「딸을 낳던 날의 기억」)은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여성적 세계를 보여준다. 그곳에 현실세계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자연스러운 우주의 질서가 있으며, 시간도 역사적으로 흐르지 않고 층층이 감기고 쌓이는 놀이적인 시간 속에서 순환한다. 과거-현재-미래의 선형적 시간이 파괴되어 나의 아이, 나, 그리고 무수한 어머니들이 공존한다. 

여기서 '나=나의 어머니=나의 딸'이라는 등식이 형성된다. 이것은 현실세계에서의 '엄마와 딸'의 모계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출산이라는 여성적인 공간의 새로운 질서를 뜻하다. 출산을 통해 '나'는 '나'의 몸이라는 장소에서 그토록 많은 어머니들과 소통하여 '여성의 몸'이라는 더 큰 몸이 된다. 더 큰 몸으로 '나'는 '나'의 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며 '거울' 안의 작은 한 몸이 되어 타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아이=나의 타자=내가 낳은 나'라는 두 번째 등식이다. 

출산이라는 경험이 모든 어머니들을 연결시킨다. 김혜순은 "나는 출산을 통해 '몸'이 된다."고 고백한다. 몸-됨은 '내가' 언제든지 '나'라는 영혼과 분리되고 타자의 영혼을 '나'라는 몸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회귀점에서 나의 과거와 미래를 만나 과거와 미래에 있는 모든 여성들을 또 다른 '나'로서 '나'와 연결된다. 내 딸의 탄생으로 얻어진 또 다른 '나'(딸이 내 몸속에서 나간 뒤에 죽음으로 남겨진 '나')의 탄생은 딸이 어머니를 양육하는 역으로의 양육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빈사(瀕死)를 경험해 딸을 출산한 후 다시 살아나는 또 다른 '나'는 딸로부터 길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나'라는 몸은 여성적인 공간(죽음과 환상의 공간)을 현실공간과 연결시키는 존재, 그 사이의 존재이다. 그래서 김혜순의 시에서 또 다른 등식인 '죽음=여성적인 시공간=놀이의 현장'이 존재한다. 

이 여성적 공간에서 최초의 '어머니'까지 만난다는 것은 혈연과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딸은 '나'와 핏줄로 묶어있지 않고 '어머니'의 놀이로 '나'와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때 혈연이라는 끈이 느슨해지고 중요치 않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여성적'인 관계는 탈-혈연적이다. 외할머니, 어머니와 딸은 수직적으로 내린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길러내며 양육하는 역으로도, 평면적으로도 성립된 관계이다. 모든 여자들이 각자이면서 '나'이고, 그 죽음과 삶의 사이의 공간에서 같이 놀이한다. 그것은 '나'와 '나'의 놀이인 것이다. 

이 여성연대의 찾기는 『또 하나의 문화』의 작업과 병행한다. 1985년에 출판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와 1988년에 출판된『어느 별의 지옥』이 창작되고 발표되는 시기에 김혜순은 『또 하나의 문화』 활동에 참여하면서 문학, 미술, 여성학, 영문학 등 여러 영역의 전공자들과 함께 사회의 각 위치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여성들과 만나면서 '여성성'을 연구해 나가는 시기였다. 김혜순은 자신이 "여성주의를 담론적 실천으로 키우게 된 것은 '또 하나의 문화'에서 동인 활동을 하면서"부터라고 밝힌 것을 보면 또문과 김혜순은 서로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문 1호에서 조옥라의 「부모는 저절로 되는 것인가?」라는 글에서 핏줄의식을 "그 배타성 때문에 산업사회 구조에 적합한 좀 더 보편적인 사회관계를 맺는 데 저해작용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여 '자녀들과 부모의 관계에서도 혈연적인 연결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교류로 맺어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사람과 사람의 연관관계는 더 보편적이고 포용적이여야 하며 혈연적인 연결이 아닌, 다른 연결(인격적인 교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문은 부모와 아이,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위계질서를 없애려고 했으며 주부와 나이 어린 여학생의 글을 인쇄하여 무크지에 실리게 하며 새로운 연대관계를 형성하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또문의 여성연대 찾기가 서로 돌보며 길러내고, 그 길러냄이 역으로도 진행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서로가 서로의 길러내는 역할, 가르치는 역할, 교육하는 역할이 될 수 있다는 관계를 형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남성의 '할아버지-아버지-아들'의 수직적으로 위에서 내리치는, 아래가 절대복종하는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역으로도 무한히 가능한 통로이다. 

결국 우리의 연대는 '어머니'역할의 공유(길러내는 역할의 공유)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어머니는 나를 낳아준 생물학적 어머니가 아니라, '나'라는 어머니도 아니다. "어머니로서의 입장,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어머니'는 결코 나만의 어머니, 나와 혈연적 관계만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 한 사람의 가계보가 아니다. 외할머니, 고조할머니…궁극적으로 '어머니'는 인류의 시조(始祖), 모든 여성들이 서로 통해있다는 매개인 것이다. 그 길러냄의 과정에서 우리는 신체적, 외재적인 조건, 즉 나이, 계급, 직업 등 모든 껍데기를 벗어나서 어머니와 자식(딸)의 관계가 된다. 한 몸에 있을 때처럼 온 신경을 통해 느끼고 아파하고 자신을 건네주고 함께 하는 것이다. 조옥라가 말하는 '인격적인 교류'는 타인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비워놓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언제든지 한 몸이 될 수 있고, 언제든지 자신의 몸에서 상대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놀이로 연결되는 관계이다.

이렇게 놀이로 연결된 '우리'는 핏줄이 아니며 법적이나 도덕적인 책임과 의무가 없는 한 층 느슨해진 관계이다. 하지만 놀이하는 과정에서 '나'는 모든 타자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느끼며 현현하고, '나'의 몸과 타자의 몸이 접촉하여 놀이를 진행한다. 이것은 또 다른 '나'를 '나'의 몸에 초대하여 함께 사는 것으로, 결국 놀이의 연결은 '나'와 '나'의 연결이 된다. 이것보다 더 긴밀하고 끈끈한 관계도 없을 것이다. 


3. 시인의 놀이—놀이로서 공동체의 구원 
산으로 가야지/검은 밥과 검은 죽음과 검은 배고픔과 검은 추위와/그리고 검은 고통에게/모두 내어주고/천근 바위보다 더 무거운/검은 영혼 아래/몸을 누이고/저기 저 사라져가는 /반짝 내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봐두어야지/그 산으로 걸어서 가야지/굶어 죽으러 

--「산으로 가야지」부분, 『어느 별의 지옥』

1980년대 중후반에 시적 화자인 '어머니'의 놀이가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들어 시인의 놀이가 되었다. 여기서 시적화자와 시적자아의 공명이 형성되었다. 90년대 이후의 시, 미래의 시를 전망하면서 김혜순이 자신의 바람과 요구를 제시한 것이다. '여성시인' 김혜순이 1980년대를 거쳐 '여성'이라는 키워드 보다 다시 '시인'에 더 가까워졌다. 

「산으로 가야지」 중에 '산으로 가는 것'은 고통을 맞이하는 것과 시쓰기의 과정이라는 두 가지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화자가 집이라는 중심에서 탈주하여 주변적인 위치로, 아픔의 핵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다. 고통과 완전히 접촉하기 위해 '나'는 '맨발로, 혼자서 몰래' 간다. 밤과 산의 경계선이 사라지고 서로를 몸속으로 담고 함께 발효하며 서로를 융합할 때, 과거의 '나'는 지금-여기의 고통을 경험해 문법적이지 않는 새로운 언어를 뱉어낸다. 가족들에게 밥하고 불을 지피는 가사노동에게 '내'가 굶어죽고 먹힘을 통해 비가시적인 '검은 세계'가 발견되며 시가 불모(不毛)로 탄생되었다.

죽으러 가고 있는 시적화자의 행동과 미래지향적인 '-어/아/여/해야지' 문법의 혼용이 '산으로 가서 죽음을 얻는 것'의 시태(時態)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죽음처럼 정지되어 있는 과거와 죽음을 얻으려고 하는 미래가 지금-여기로 모두 모여 '굶어 죽으러 산으로 가는' 행위의 순환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여성시인은 죽음에 중단 없는 참여로 스스로 버려짐을, 스스로 죽음으로의 잠수함을 매번 다시 반복한다. 

이것은 시인으로서 김혜순의 현실이다. 최승자가 김혜순의 「산으로 가야지」를 "내가 알고 있는 여자이며 딸이며 아내이며 어머니인 김혜순의 현실적인 모습이 가장 분명하게 가장 사실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시"로 뽑은 것처럼 시인으로서의 김혜순은 고통을 '일용할 독'처럼 복용하고, '악몽의 덩어리'와 무한히 가까워지면서 자신을 죽임으로써 죽음을 자신의 몸 안으로 담아 견딜 수없이 시를 폭발한다. 이토록 자신을 죽이고 극도로 아픈 죽음의 공간으로 끊임없이 가는 이유가 그 고통의 근원에서 어머니의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의 얼굴은 사랑을 지배하는 근원적인 차이이기 때문에 여성시인은 그때그때 현재의 사랑 속에서 반복된다. 사랑을 얻는 것이 여성시인이 자기-죽이기 놀이를 끝없이 반복하는 이유이다. 

시인이 아픔을 잉태하고 시를 출산하는 행위는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다. 이 사랑은 "두개골에선 죽은 너희들 넋이 녹아/내 핏줄기 속으로 섞여들고/(...)/나/또한 /녹아내릴 때까지"(「치료」)처럼 공동체를 향해, 타인에 향해있다. 시인은 죽음의 길을 밝히는 동시에 산 사람의 삶을 닦아주며 위로해주고, 사랑을 배부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내 딸이 점잖게 /난 강시가 될 거야 꼭 /강시가 되어서 엄마 아빠 깨물면/모두 강시가 되는 거야/엄마 아빠도 다른 사람 깨물어!/그럼 그 사람도 강시 되는 거야 /막 깨물고 싶어지는 거야

--「귀신으로 꽉찬 조국」부분, 『우리들의 음화』 

강시가 사람을 깨물면 새로운 강시가 탄생된다는 것을 보면 깨물기는 사랑의 행위로 이해된다. 깨무는 행위를 통해 '나'는 '나'의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연결된다. 오히려 핏줄로 연결된 개인적인 가족관계가 끝없이 쪼개지며 분열되고 확장된다. 강시의 깨물기로 형성된 가족은 "아버지 남자와 어머니 여자, 동생남자와 나 여자가 사는 가족이 아니라, 여자도 남자도 아닌 분열된 가족구성원으로 함께 모인 최고의 가족"이 된다. 이처럼 가족의 가보(家譜)는 연대기가 아니라 끝없이 "비정상적인 가족이 나타나는 세상", 즉 공동체가 된다. 

한편 강시라는 존재가 인간사회 변방에서 인간과 흡사한 얼굴을 한 이중의 타자로 고착화된 인간사회의 가치질서에 내재된 배타적 폭력성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강시의 깨물기는 삶과 죽음, 인간과 귀신, 선과 악의 분리를 사랑으로 봉합하는 행위이다. 또한 그 행위는 자신의 배고픔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막 깨물고 싶어지는' 충동, 타자와 접촉하고 싶은 가장 자연스러운 충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타자로 환원시키고 모든 사람의 타자-만들기를 실현하는 사랑의 놀이인 것이다. 깨물면 깨물수록 '나'라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사라지고 강시로서의 또 다른 '나'라는 존재만 남아 무한 증가한다. 따라서 딸의 '강시-됨'은 자신을 무한히 해체하는 것으로 타인을 살리고 환원하는 것,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부분인 타자성을 되찾게 하는 것, '조국'이라는 공동체를 구원하는 것이다. 

딸의 '강시-됨'은 시인으로서 김혜순이 스스로 위치시키는 곳이며 딸의 소원은 김혜순이 1990년대의 시에 대한 바람이다. 어머니가 타자와 접촉하고 새로운 타자를 출산하는 것처럼, 무당이 신내림을 받고 사람을 위로하는 것"처럼, 바리데기가 서천서역에 가서 약수를 구해오는 것처럼, 시인이 아픔을 모시고 시를 출산하는 일은 타인을 향해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공동체를 병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다. 

배고픈 죽음이/또다시 뒷발 들고/우뚝 서서 포효하고 있어요/내 입까지 차올라와요 (중략)

그리하여 나는 부글부글 끓어올라요/입김이 뭉글뭉글 솟아오르잖아요?/수많은 추억을 혼합하여 끓인 찌개처럼/돌아온 당신들이 쓰러진 나를/흰 식탁에 내려놓고/찬 숟가락을 확 들이밀 때까지/내가 이제 더 이상 불 것이 없을 때까지

나는 시방 또 끓어올라요

--「내 詩를 드세요」부분 『우리들의 음화』

시인은 괴롭힘과 배고픈 죽음을 당했지만 '당신들'의 배고픔을 달래는 찌개를 만들어 '돌아온 당신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소모시켜 "남의 아픔을 자근자근 밟아주고, 대신 울어주고, 대신 춤춰주고, 대신 노래해주고, 실뭉치처럼 뭉친 응어리를 고운 명주 실타래로 풀어내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의 창을 여"는 사람이다. 시인은 아픔을 계속 환기하고 담아주는 껍질과 같은 사람이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몸속에 담아들고 더욱 아파하는 사람이다. 시인이 일용할 독을 복용하여 고통의 끝까지 가서 사랑이 솟아나 이웃들에게 나뉜다. 어머니가 빈사의 경험 속에서 딸을 출산하듯이, 시인이 그 여성적인 공간에서, 놀이의 공간에서 일회의 반복을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하는 지점에서 시를 출산하는 것이다. 시인은 '내 육체의 완벽한 구조 안에/슬픈 내용을 넘치도록 담아들고'(「시체는 슬픔 때문에 썩는다」), 아픔을 제 몸으로 통과시키는 '중심에 바람 든 기구'(「中風」)처럼 비어있다. 

그렇게 시인은 자신을 죽도록 비워놓고 '당신들'이라는 공동체를 향해 열려있다. 고문당하고 착취당한 과거(추억)의 '나'는 죽음으로서 '당신들'의 위장에서 '몸속으로 잠입한 죽음 한 방울'(「기쁨」)처럼 퍼진다. 이때 먹는 행위라는 접촉을 통해 '나'와 '당신들'은 하나의 큰 몸이 된다. 그것은 글쓰기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공동체, 즉 비대칭의 분리 불가능한 타자성을 분유하는 존재 나눔의 공동체(우리/모두One)이며, 시라는 매개로 상통한다. 

1980년대 김혜순의 시는 끊임없이 새끼 치는 이(蝨)의 시(「詩」), 세상을 비우고 지우는 무(無)의 시(「리듬」), 사이사이에서 꽃피는 곰팡이의 시이다. 그리고 그 하염없이 자신을 무로 돌리고 세상을 새롭게 창출하는 힘은 놀이의 파괴-생성-반복의 순환에 있다. 놀이로서 1980년대의 시대적 억압에 저항하는 정당성, 놀이로서 우리의 연결성이 부각된다. 이 연결은 여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서 출발을 했을 뿐이다. 1990년대 이후의 시집들에서 그 연결은 인류, 동물, 생물, 비(非)생물에까지 확장된다. 결국 이 놀이는 김혜순의 시로 다시 돌아온다. 시는 놀이가 다시 반복되는 지점에서 '나'의 죽음을 세상의 새로운 탄생으로 전환하는 것, '우리'라는 공동체의 큰 몸을 끊임없이 형성하고 확장하는 것, 과거와 미래를 지금으로 당겨오며 보이지 않는 현실 그 아래의 현실에서 '우리'를 현상하는 것이다.

 

주석

1970년대의 유행인 '고고춤'은 "당시 유행하는 트위스트, 몽키, 스윔, 림보 등을 총망라해 부르던 이름이었다. 춤을 모르는 젊은이들도 고고장에 모여 맥주 한 잔과 함께 막춤으로 호기를 달랬다. 그리고 고고 열풍은 야외로도 이어졌고, 당시 야전을 들고 밖으로 나와 춤을 추던 풍경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고고장은 한 때 성년이 되는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며 밤거리의 왕으로 군림했으며 군사정권의 그늘 아래서 자유를 만끽할 수 없는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었으나 풍기문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단속이 지속되면서 빈번히 영업 정지를 당했다." 강원래·박성건, 『THE DANCE: 한국 댄스뮤직 100년사』, 그래서음악, 2021, 45~50쪽.

금지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탁식 서울시장은 12일 상오 시내 모든 「나이트·클럽」·「바」·「카바레」등 관광유흥업소에 대해 이날부터 「고고」 음악이나 「고고」 춤을 금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위반업소에 대해서는 식품위생법 23조 2항(영업허가제한)과 25조(허가취소)를 적용, 모두 영업정지, 또는 허가 취소한다고 밝혔다. 양 시장은 사회적으로 「고고」 가 퇴폐풍조의 원천으로 지적되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나이트·클럽」·「바」·「카바레」등에 고고 춤·고고음악 금지령>, 중앙일보, 1972년 10월 12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32419#home

김혜순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라는 이정표를 통과하면서 어른들이 황혼녘이면 찾아가 긴장을 풀어 놓는 장소를 드나들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김혜순, 『장미의 이름으로 떠나는 작은 여행』, 웅진문화, 1991, 188쪽.

"1973년 10월엔 다방을 전세 내 고고춤을 추며 동창회를 하던 대학생 84명 전원을 경찰이 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고 열풍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서울의 고고클럽을 단속했더니 고고족들이 인천 등으로 지방원정을 가는 '풍선효과'도 나타났다. 심야영업을 금하자 클럽들은 셔터를 내리고 몰래 철야영업했다. 결국 고고춤 유행은 제 수명을 다하고 1978년쯤부터 디스코와 바통 터치했다." 김명환, <"反사회적 유흥" 고고춤 전면금지령… 춤추던 대학생 84명 무더기 연행도>, 조선일보, 2016년 5월 18일.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17/2016051703652.html

1972유신헌법이 반포되자 저항을 받은 후 일련의 금지령이 발포되었다. 1972년 고고춤 금지령이 발포되고 1973년 <경범죄처벌법>에서 남성의 장발과 여성의 미니스커트를 금지했다.

1980년대 중후반은 김혜순이 또 하나의 문화와 함께 작업했던 시기이다. 『또 하나의 문화』 3호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4호는 편집까지 참여했다.

김혜순, 「어머니와 처녀라는 허구」,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02, 172쪽.  

이 글에서의 '놀이'(Spiel)는 니체, 하이데거, 가다머, 들뢰즈의 놀이철학, 즉 파괴-생성-반복의 흐름을 기반으로 한다. 하이데거는 '근거가 없는 존재, 그러면서 그때마다 그 자신을 보여주고 인간의 마주하는 응대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성립시키는 존재, 그러나 거기에서 아무런 법칙도 찾아낼 수 없는 존재'로 놀이를 인식한다. 그리고 '놀이하기'를 모든 것이 그것에 의해 정립될 수 있도록 자신을 보내주면서 다시금 자신을 자기 안에 모으는 법-칙(Ge-setz)'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은해,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놀이개념」, 『人文論叢』 57, 2007, 63쪽.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세계를 언제나 생성중인 차이와 반복의 놀이라고 본다. 놀이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는 역시 언제나 타자와 접속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되어감의 도상, 즉 과정중에 있다. 정낙림, 「놀이와 철학-들뢰즈의 니체해석2」, 『니체연구』 38, 2020, 159쪽. 

서동욱, 「가다머에서 놀이로서의 예술과 반복—하이데거와 들뢰즈의 반복 개념과 비교」, 『철학논집』 70, 2022, 82쪽. 

김혜순, 「어머니로서의 시 텍스트-내가 어머니를 낳는, 거꾸로의 출산을 위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02, 85~86쪽. 

김혜순, 「어머니와 처녀라는 허구」,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02, 171쪽.  

김혜순·황인찬, 『김혜순의 말』, 마음산책, 2023, 117쪽. 또한 김혜순은 "저는 방학 중에 초등학생, 중고등학생을 데리고 하는 여성주의 캠프에 참여하기도 했고, 이 모임에서의 대화들을 통해 여성해방의 언어를 경험하기도 했지요."라고 회상한다. 

"이러한 핏줄주의는 남에게 대한 배타성을 수반하여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표현에서 보여주듯이, 핏줄로 연결되지 않은 관계에서는 완전한 신뢰를 유보한다. '부모—자녀'관계의 특수한 핏줄관계를 강조하면 할수록 그 관계는 소유적인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부모는 인생의 재미와 의미를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조옥라, 「부모는 저절로 되는 것인가?」, 『또하나의 문화1: 평등한 부모 자유로운 아이』, 또하나의문화, 1995, 44~46쪽. 

김혜순, 「어머니로서의 시 텍스트」,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02, 84쪽.

김혜순, 「공간」,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02, 41쪽.

"굶어 죽으러 가는 그 暗中 산로는 어쩌면 시를 향한 길은 아닐까. 그건 당신이 오직 시만을 위해서 산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혼자서, 맨발로, 굶어 죽으러가는 마음이 바로, 당신에게 시 쓰게 만드는 마음이 아니겠냐는 뜻이다. 일상생활, 가족생활의 한가운데서 당신은 여자이고, 아내이고 어머니이지만, 그 추위와 검은 고통에 먹히우면서, 그것들로써, 당신의 궁핍과 불모로써 무엇인가를 생산해내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 곧 시인이 아니겠냐는 말이다. 그리고 당신이 굶어 죽음으로써 생산해낼 수밖에 없는 그것, 그것이 바로 당신의 시가 아닌지. 검은 밤에 자신의 검은 죽음만을 데불고, 홀로 맨발로 산중으로 걸어 들어가 굶어 죽는 것이, '빛이 반죽인 알을 낳고 싶어 하는', 시를 낳고 싶어하는 당신의 한 출산의 방식이 아닌지." 최승자, 「산으로 가는 당신에게」, 기획특집 상호시평·시 속의 행간읽기 「서로의 세계를 읽는다」, 『현대시학』 9, 1991. 148~149쪽. 

"우리에겐 일용할 눈물, 일용할 아픔이 필요하다. 눈물로 벗어나기, 버리기 외에도 나를 정화시키는 또 하나의 도구는 고통이다." 김혜순, 『장미의 이름으로 떠나는 작은 여행』, 웅진문화, 1991, 내표지.

"시집을 계속 낸다는 것은 제 얼굴에 자꾸 글씨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자신의 시들로써 악몽의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지요." 김혜순·서동욱, 「몸 속의 물을 깨워내기」, 『문학동네』 40, 2004. 

 "어떤 맨얼굴을 딱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낳고 내 몸에서 사라진 어머니의 얼굴처럼 희미한 맨얼굴, 어쩌면 태아가 본 어머니의 얼굴이라 할까요. 그 얼굴이 고통의 근원처럼, 얇은 심장처럼, 곧 찢어질 낙랑공주의 북처럼 박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얼굴 앞에서 저는 한낱 리듬의 먹잇감이었습니다." 김혜순·조재룡, 「지금-여기, 시가 할 수 있었던 것들, 시가 해야만 했던 말들」, 『문학동네』 23, 2016.

"근본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경험 너머 먼 곳의 이미지이고, 우리를 초월하는 테마이며, 일종의 원형이다. 이미지, 관념 혹은 본질은…우리의 연속되는 사랑들 속에서, 또 따로따로 고립된 것으로 고려된 우리의 사랑들 각각 속에서 반복될 만큼 충분히 풍부하다." 들뢰즈, 서동욱·이충민 옮김,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108쪽. 

김혜순은 시인의 놀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인은 자신의 아픔을 몸속에 넣어놓고, 모시고 얼르고 놀아주고 축제를 벌여주며 때맞춰 제사지내는 사람이다. (중략) 시인은 밤이면 밤마다 어둠 붙여들고 아픔 맞으러 산에 오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은 제 아픔의 신은 뼛속에 감춰두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얼르는 사람이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진 않지만 시인의 눈에는 빠안히 보이는 병든 귀신들을 얼르고 놀아주다 저 멀리로 보내는 사람이다." 김혜순, 『우리들의 음화』, 문학과지성사, 1990, 뒤표지. 

김혜순·황인찬, 『김혜순의 말』, 마음산책, 2023, 168쪽. 

안숭범·조한기, 「'간극의 공간'을 유랑하는 경계인으로서 구미호, 강시 캐릭터 연구」, 『대중서사연구』 23, 2017, 319쪽. 

"무당 같은 시인이 되고 싶다. 그 신들린 무당에게서 들려오는 신의 말, 얼마나 큰 말인가. (중략) 그 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안의 고통의 다른 이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을 모시고 사는 그들. 신을 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략) 그러하기 위해 나도 신내림을 받고 위로하는 사람이 된 무당처럼 고통을 끌어안고 '일'하고 싶다. 동산을 가꾸는 일을, 사랑으로 몸과 세상을 씻는 일을." 김혜순, 『장미의 이름으로 떠나는 작은 여행』, 웅진문화, 1991, 194~199쪽. 

바리데기의 탐색이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려는 목적 하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다. "무구와 신복을 찾아낸다는 것은 개인의 직업이나 능력을 스스로 찾아내었다는 의미를 넘어서, 그 공동체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자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바리데기가 약수를 구해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아버지를 구하는 것을 넘어서 바리데기가 처한 공동체 전체와의 신체적 접촉을 통한 새로운 양육을 감행하기 위함이다. 즉 약수는 공동체를 위한 젖이다." 김혜순, 「물」,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02, 102~103쪽. 

김혜순, 「어머니」,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02, 53쪽. 

김혜순, 『장미의 이름으로 떠나는 작은 여행』, 웅진문화, 1991, 132쪽. 

김수이, 「공동체의 목소리, 목소리의 공동체—1980년대 황지우의 시를 중심으로」, 『현대문학이론연구』 62, 2015, 99~100쪽. 
 

주예은(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7기) 원우.
주예은(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7기) 원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