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기자 (webmaster@skkuw.com)

허위의 안개 너머로 맞춘 시선

오현지(인과계열 23)

 

0.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의 글에서 발췌되어 널리 알려진 위 구절은, 기실 원문의 일부에 불과하다. 생략된 부분을 불러와 다시 해석하자면 이렇다.

There is no such this as Woman, with capital W indicating the universal.

보편을 가리키는 대문자 w로 쓰인 그런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72p.

일부만 놓고 보면 언뜻 모호해 보이지만, 전문을 따지자면 의도는 적확하다. 위의 문장은 여성의 실체 자체가 아니라 보편으로 존재하는 ‘여성’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는 우리가 여성을 ‘여성’으로 규정할 수 있으리라 믿어온 ‘여성성’이 허위일 뿐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모든 성별 담론의 합의점을 지금 여기에서 찾을 수는 없겠지만, 어떤 기질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개인을 가두는 틀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는 많은 이들이 동감할 것 같다. 이 글은 우선 ‘여성성’을 허위로 보는 라캉의 이론적 바탕에서 출발하지만, 허위보다 허위의 압력에 초점을 맞춘다.

선천적 성차와 후천적 성차를 구분하는 경계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에 머무른다. 섹스만이 젠더를 결정짓는다는 이론이 있는가 하면, 근래에는 섹스조차 젠더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는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도 받아들여진다. 다만 남성만을 man, 즉 인간과 동치 관계로 여겨왔던 인식 속에서 wo-man(여자-사람)인 여성이 오래도록 ‘제2의 성’에 속했다는 사실은, 라캉이나 보부아르, 이리가레, 크리스테바의 저명한 이론 모두에서 공통으로 발견된다. 이렇듯 ‘여성’은 ‘남성이 아닌 성’, ‘남성에서 파생된 성’으로 규정되어 온 역사가 있고, 오늘날까지 희미하게 그 여파가 남아 있다.

남성의 이야기는 일반성에 대한 검증 없이도 자연스레 인간 보편의 이야기로 설명되었다. 반면 ‘남성이 아닌 성’으로서 여성의 이야기는 그 내용이 세상의 절반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특수하고 작은 이야기로 여겨지곤 했다. 그 자체로 특징이었던 여성의 서사들은 내용과 무관하게 ‘여성 서사’로 총칭되어 왔다. 이런 문학사적 맥락을 따라온 ‘여성 서사’라는 범박한 분류는, 오늘날 여성을 ‘인간 보편’의 영역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일반 (남성) 서사와 구분하는 동시에 ‘일반적이지 않은’ 것으로 무심코 여기게 한다.

여성을 다루는 작품은 이 비-일반성 때문에 여성주의적 속성을 띈다. 꼭 엄격한 여성주의적 단결로 가부장적 질서에 반항하고 투쟁하려 하지 않아도, 여성 서사는 그 자체로 여성주의에 일면 이바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것을 보는 방식만이 정치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무엇을 볼 것이고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조차 정치의 산물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여성 서사는 그래서 시작부터 정치적이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최은영의 두 작품을 다루기 전에, ‘여성 서사’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삶을 다루는 서사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자. 여성 서사는 사회를 변혁하고 여권을 증진하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나 결단 없이도 발생한다. 작가 본인이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최은영은 “여성주의에 편승해 인기를” 누리기 위해 여성 서사를 쓰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어디서든 자신에게서 ‘여성’을 떼어낼 수 없으므로, 여성의 삶을 그리다 보면 자연히 여성주의적 성격은 스며들기 마련이다. ‘일반’ 서사와 다른 존재로서의 여성 서사가 아니라, 인간 서사를 분류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인 여성 서사다. 여성(서사)가 아니라 (여성)서사다.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 『내게 무해한 사람』(문학동네 2018), 『밝은 밤』(문학동네 2021)에 이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문학동네 2023)까지, 최은영은 계속해서 여성 간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려왔다. ‘여성성’이라는 허위가 흐려놓은 세상 속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순간뿐이라도 ‘우리’일 수 있을까. 최은영의 소설에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이어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다.

 

1. 외면할 수 없는, 여성 안의 ‘여성’ - 「몫」
여성(woman)은 ‘wo-’가 적힌 꼬리표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성으로 태어난 인간 존재는 죽어서도 떼어낼 수 없는 표를 쥐고 이것의 처분을 고민한다. 어떤 이는 ‘여성성’을 폄하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서 그 속성을 분리한다. 누군가는 내가 다른 여성과 달리 ‘남성적’이라고 호소하며 권력의 중심부로 나아간다. 누군가는 ‘여성성’을 활용해 사랑을 이루고 안정을 찾는다. 누군가는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내 인생에 걸림돌이 될 리 없다고 굳게 믿는다. 누군가는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거대한 감옥처럼 느낀다.

「몫」은 희영의 죽음 이후 만난 정윤과 해진의 대화로 시작한다. 학부 시절의 정윤은 “취재에 기반”한 “건조한 문장으로” 집요한 글을 쓰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의 문장은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이고,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52)이다. 반면 희영은 “망설이지 않고 검은색 플러스펜으로 글을 쓰던”(53) 사람이다. 그가 쓰는 단어는 섬세한 관찰력과 통찰력, 상처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부터 우러나온다. ‘당신’에게 정윤의 글은 자신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하고, 희영의 글은 영원히 그런 글을 쓸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을 안긴다. 그런 정윤과 희영, 두 사람의 관계는 글로 이어져 여성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단단해지고 또 흔들린다.

교지에서 정윤은 수면 위로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그럴듯한 핑계를 내세우면서, 희영은 그 논리를 뒤에 업고 여성으로서의 발화를 이어가면서 서로와 연대한다. 정윤은 대학원 내 성폭력 사건을 다루려는 희영을 두둔하며 “이건 일개 여성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 사회의 기형적인 권력구조에 관한 문제”(57)라고 말한다. 이는 그 사건이 여성 문제보다 “더 큰 억압의 문제”(57)라는 합리적인 포장으로 논의를 표면에 꺼내놓기 위한 정윤의 배려이다. 희영이 가져온 주제들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논의조차 될 수 없었던 이야기”(57)이기 때문이다. 여성 문제를 작은 것으로 치부하는 언어에 희영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주제는 그런 시선에 기반한 보호 없이 회의를 통과하기 어려웠다. 정윤의 의도를 읽은 그녀는, 그래서 그의 말을 조용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테바는 “성차를 둘러싼 시각 차이”(누가 안티고네를 두려워하는가, 22)를 기준으로 페미니즘을 세 단계로 가른다. 우선 1단계에서는 “보편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으나 사실은 남성의 것으로 전유되어왔던 가치를 중립화”(23)해 여성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실질적 평등을 이룬다. 그다음 평가절하되어 온 ‘여성성’의 가치를 재해석한다. 3단계에서는 “성별 이분법 그 자체가 형이상학”(24)이라고 보고 정체성 개념 자체에 도전한다. 이 구분은 우리가 여성성과 남성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될 고민과 비판에서 비롯된다. 여성에게 억압으로 작용하는 ‘여성성’을 깨부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결국 중립화의 명목으로 모든 사람을 실질적 남성화할 뿐이라는 비판을 마주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성성’을 부수는 동시에 ‘여성성’의 가치를 재평가해야 하는 이중적 상황에 놓인다. 감성, 섬세함, 부드러움 등으로 상징되는 ‘여성적’ 속성들이 이성, 합리성, 강한 힘만큼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들이 ‘여성성’은 아니라는 외침을 동시에 해야만 하는 것이다.

정윤은 이를 어슴푸레 인지한다. 그녀는 여성적 발화가 “감상적이고, 편향된 관점을 지녔다고”(31) 폄하 되어왔다는 사실과, ‘여성성’과 여성 친화성이 여성 문제에 대한 그들의 의견에 설득력을 주기 어렵게 한다는 아이러니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여성 문제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허울 좋은 논리를 이용해 다른 여성이 여성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도왔다. 정윤은 ‘여성성’을 피하는 방식을 향해 간다. 섬세하고 아름답기보다 논리적이고 단단한 자신의 문체처럼, 그녀는 감상에 젖지 않으려고 분투하며 제 목소리의 합리성과 설득력을 지켜내고자 한 것이다.

이들의 침묵 속 연대는 정윤의 연애를 기점으로 어긋난다. 정윤이를 존경한다고 과장해 말하던 용욱과 연애를 시작한 이후 정윤의 태도는 미세하게 변화한다. 정윤은 더 이상 희영이 제 주제를 관철하도록 돕지 않는다. 그녀는 희영에게 쏟아지는 날 선 비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려우니 “남편을 살해한 여자들의 이야기는 빼는 게 좋을 것”(67) 같다고 조언한다. 그 제안을 끊고 “감정의 동요 없이” 자신의 글을 읽어내리는 희영의 모습은 냉철해 보인다. 그녀의 글에는 “명확한 주장과 그를 받쳐주는 논리적인 근거”(67)가 있었다.

이후 희영은 부원들과 함께 참여한 “기지촌 여성의 오 주기 추모 집회”(69)에서 참혹한 상태의 여성 시신 사진과 그를 ‘조국의 자궁’으로 전유하는 유인물, “범죄는 모국에서! 강간은 미국에서!”라는 구호를 외치던 군중들, 그 사이로 옅게 들려오던 웃음소리를 목격하고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눈길을 끄는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던 1997년 겨울, 그녀는 난데없이 기지촌 여성 문제를 교지 회의에 내민다. 희영의 대담한 주제 선정에도 여전히 침묵을 이어가던 정윤은 이내 희영을 비판하는 제 애인의 편에 서서 말을 더한다. 한때 희영을 보호했던 “여성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식의 논리는, 이제 그녀를 가로막고 공격하는 흉기가 되어 희영을 찌른다.

“민족 주권과 빈곤의 문제를 여성 문제로 축소해서 보려는 겁니까?”

(중략)

”여성 문제요? 본인이 돌아가신 분과 같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건 오만한 생각 아닌가. 너무 다른 입장 아닌가. 희영은 그런 삶을 경험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 삶에 대해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희영이 그렇게 가난해 본 적 있어요? 몸을 팔아야 할 만큼? 대학 교육까지 받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신발 신으면서 희영이 같은 여자랍시고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73)

희영은 교지에 입부한 이래 처음으로 직접 자신이 내어온 주제를 포기한다. 희영에게는 읽는 이를 좌절하게 할 만큼 거침없고 수려한 솜씨가 담긴 특유의 글을 쓰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한 번도 확신한 적이 없었다. 분명한 논리로 자기 의견을 관철시켜가던 희영의 강한 얼굴 뒤로 자신은 글을 쓸 자격도 재주도 없다는 괴로움이 자리하고 있었다.”(64) 남의 상처에 아프게 공감하고 발견한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희영은 그 성정 때문에 괴로워했다. 제 마음이 어떻게 망가지는 지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타자의 아픔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자격 미달이라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면서. 희영에게 정윤의 비판은 가슴 깊이 상흔을 남겨 그녀를 일깨운다. 희영은 자신이 정윤의 말마따나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고통받는 약자들의 삶을 영영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또한 언제든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허울 좋은 논리’의 보호 아래서 쓰는 글의 무용성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그래서 희영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는 대신 기지촌에서 활동하기를 선택한다.

언뜻 희영은 어쩌면 정윤과 반대로 유약하고 감성적인, 다시 말해 ‘여성적’인 면을 가진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종종 정윤보다 더 용감하고 강인했다. 거침없이 연약해지기를 결심하는 희영으로부터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분법은 해체된다. 각 단어를 상징하는 속성들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생 관계에 놓여 있다. 반면 정윤의 여성성을 향한 자기혐오는 되레 모든 것을 ‘여성성’의 탓으로 돌려 여성의 문제에 눈을 감고 현실에 안착하도록 한다. 감정을 견제하며 견고하게 직조된 글을 쓰던 정윤은 학업을 포기하고 남편의 유학을 돕고자 미국으로 떠난다. ‘여성성’의 맹목적인 추구 혹은 기피는 필연적으로 자기혐오를 낳는다. 여성은 여성 자신 안의 ‘여성’조차 허구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자기혐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희영은 정윤을 “사랑하고 싶었으나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82)다고 고백한다. 같은 마음으로 다른 곳을 바라봤던 그들은 어긋난 채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최은영의 서술은 그들의 불협화음을 다루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해진이 본인을 ‘당신’이라는 이인칭 대명사로 부르는 것은 이 이야기가 해진뿐 아니라 독자인 ‘당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당신’은 희영에게서 타자의 상처에 깊게 이입하는 재능을 보았지만, 그것이 ‘당신’ 자신에게도 있음은 알지 못한다. ‘당신’에겐 희영만큼 수려한 글을 쓸 재능은 없었지만, 잘 쓴 글을 알아보는 직관과 그것을 끈질기게 사랑할 용기가 있었다. ‘당신’은 또한 이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당신’은 정윤을 이해하면서도 희영의 글의 효용에 대한 고민과 자기반성을 잊지 않을 것이다. 끝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아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75)을 느끼곤 하면서, “쓰고 싶어서 쓰는 마음, 마음을 다해서 쓰고 싶다는 마음”(65)으로 기민하게 주변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목소리를 낼 것이다.

최은영은 누구의 삶이 나쁘거나 비겁했다고 쉽사리 단언하지 않는다. 세 사람은 교지 내부에서 각자의 몫을 지켰다. 이들은 논의를 바깥으로 끌어내고, 단단하게 짜인 글을 쓰고,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문제를 깊이 사유했다. 정윤은 끝내 희영의 눈을 피했고, 희영은 정윤과 닿지 못했다. 그러나 ‘당신’은 둘의 형체가 흐릿해져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 모습을 응시한다. 「몫」 의 여성들은 세계 안에서 각자 다른 몫을 맡아 가지만, 자신들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공유하며 글로 서로를 이어 붙인다.

 

2. 유약한 모습마저 끌어안는 사랑 - 「답신」
앞선 작품이 다소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동료애를 다루었다면, 「답신」은 기울어진 관계에서 외롭고 서투르게 나아가는 가족애를 그린다. 「답신」은 언니의 아이를 향해 ‘나’가 쓰는 편지 형식으로 전개된다. ‘나’는 “내 존재를 언니와 떨어뜨려서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만큼 언니와 동질성을 공유하지만, 언니와 동생이라는 관계의 차이는 둘의 삶을 서로 다른 모양으로 끌어간다. 여기서 언니와 ‘나’의 사랑은 어긋난 시차와 뒤틀린 형태로 뒤엉키는 양태를 보인다.

어릴 적 ‘나’는 돈이 없어도 동생에게는 “충분히 따뜻한 옷”(134)을 입혀 주는 언니의 섬세한 사랑으로 자랐지만, 언니의 마음을 보살필 사람은 없었다. 언니는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으나 작품 안에서 나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마음으로 읊조리는 아이들의 몸은 너무도 작고 여리다. 겪어보지 못한 낯선 사랑 앞에서 소녀들은 한없이 취약해진다. 성장할 겨를 없이 억눌릴 뿐이었던 언니의 “허기진 마음”(139)은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채 ‘선생님’과의 교제로 분출된다. 언니는 은행원이라는 꿈을 포기하고 가부장제 아래 자리 잡아 ‘여성’으로서 보호받는 길을 택한다. 그 가정이 실상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한 번 가부장제로 진입한 여성에게 그곳을 벗어난다는 선택지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언니는 ‘나’에게 “너희 형부는 착한 사람”(142)임을 납득시키려 하면서 그 문장을 제 안에 반복적으로 각인한다.

혼전임신으로 결혼한 언니를 바라보는 ‘나’의 감정은 연민과 멸시 사이를 진동한다. 연민과 멸시는 모두 상위자의 관점에서 타자를 깔아 보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결혼한 언니와 ‘나’가 맺는 관계는 동질성에 기반한 가족애이면서 타자를 향한 자기 만족적 베풂의 형태로 드러난다. “힘든 일이어서 여자애들은 오래 못 버틴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오기가 생”(160)기는 부류인 ‘나’는 가부장제에 편입하는 언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언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언니의 인생을 여성 혐오적 사회로 인해 ‘망가진’ 것으로 쉽게 단정하고, 그녀를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무지하고 불쌍한 약자’로 대상화한다. ‘나’는 아버지와 언니의 남편이 언니를 마치 ‘창녀’인 듯 천대하는 데에 분노하지만, 무심코 그녀를 “멍청해서”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휘둘리는 겁쟁이”(174)로 여기는 이중적 면모를 보인다. 은은하게 기저에 깔려있던 멸시는 언니가 남편의 편에 서서 자신을 거부할 때마다 울컥거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성 착취를 당하던) 학생을 굳이 신고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면서 “언니도 그랬잖아.”(166)라고 구태여 덧붙이는 ‘나’는, 여성(청소년)의 약자성을 무기로 언니의 삶을 부정하고 수치심을 안기면서 쾌감을 느낀다.

“그녀는 여자 피고인들이 사실이 아닌 불리한 증언을 부정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듯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이 있다면서 나도 그런 것 같다고 했어. 그러면서 이게 마지막이라고,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벌주려는 짓은 더는 하지 말라고 하더라.”(172)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있는 시간이 차라리 홀가분했던 거야. 그게 내가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을까. 변호인의 말이 맞았어. 나는 내가 저지른 짓보다 더 큰 벌을 원했지.”(173)

언니에게는 ‘나’가 언니를 위한다며 저지른 폭행 뒤로 드러난 뒤틀린 마음이 보였다. 언니는 ‘나’가 “그를 자극해서 언니를 때리게 했다는 듯이”(170) 여기며 자신을 구하려고 했던 동생을 마음으로 버린다. 법정에 섰을 때, “남편은 저를 때리지 않았”고 동생에게는 “제 남편에 대한 이유 모를 증오가 있었”(171)다는 언니의 거짓 증언을, 버려진 ‘나’는 체념하며 받아들인다.

최은영은 「답신」에서도 그 누구의 삶도 쉽게 흥밋거리이자 판단의 대상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기조를 지켜가며 두 여성을 다시 ‘우리’라는 단어와 사랑으로 묶는다. 다만 여기의 사랑은 이전에 ‘나’가 폭력적으로 배출한 사랑과는 다르다. 출소한 이후의 ‘나’는, 이제 사랑의 현현이라고 믿었던 본인의 행위에 언니를 동등한 주체로 여기지 않고 멋대로 내려다보는 시혜적인 태도가 섞여 있었음을 안다. ‘나’가 조카에게 쓰는 답신 없는 편지는 기실 언니의 사랑을 향한 답신이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다고 여겨서 미안하다고, 언니에게 사랑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언니가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 알려는 노력 없이 섣불리 당신과 당신의 삶을 평가해서 미안하다고. 사죄의 답신에서 ‘나’는 오래도록 미워했으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토록 사랑했던”(179) 언니와 언니의 아이를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결심한다. ‘나’의 어긋난 사랑은 늦게나마 언니에게 받아온 형태의 사랑으로 돌아온다. 연민으로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당신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하”(178)는 사랑으로 사랑하겠다고. 언니가 ‘나’에게 그렇게 해주었듯. 나를 거부하고 버려도, 당신이 한없이 비루해진다 해도 속절없는 마음으로 사랑하겠다고.

 

3. 허위의 안개 너머로 맞춘 시선
허위가 휩쓸고 간 세계에 남은 후유증은 지대했다. 부옇게 흐려져 어떤 것도 정확히 볼 수 없었다. 어쩌면 평생에 걸쳐 지워도 완전하게 소거할 수는 없을지 모르는 허위를 치우고 정리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과 몰랐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된다. 우리가 약하고 열등한 것으로 평가했던 것, 우리가 어떤 가치의 우월성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의심받아야 한다. 이 의문은 우리가 믿어온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기에 아프고 거북하다. 앞선 두 작품은 애써 외면해 온 의혹을 회의 테이블에 올린다. 그 과정에서 여성보다 “더 큰 억압의 문제”(57)가 담겨 있다는 비굴한 변명은 사용하지 않는다. 「몫」과 「답신」의 여성들은 독자에게 묻는다. 자신들을 미약한 존재로, 망가지고 뒤처진 삶으로 쉬이 평할 수 있느냐고.

최은영은 여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연대와 작은 고투를 조명한다. 개개인의 배려와 유대로 세계가 변화하리라 믿는 것은 안일한 것일지 모른다. 조용히 연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은 분명히 게으르다. 그래서 두 작품은 연대와 사랑을 모호하게 비추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안개 너머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다면, 이제 손을 뻗어 닿아야 한다. 최은영은 ‘그럴싸한 구실’로 사랑을 감춰 건네는 대신 정말로 이것들이 “그렇게 작은 문제라고 생각”(73)하느냐고 적확하게 묻는다. 그녀의 소설은 여성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진심 어린 사랑으로 쓰인다. 형태는 달라도 같은 마음을 공유한다는 동료애와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가족애로, 인물들은 ‘우리’로 이어진다. 최은영은 양경언이 해설에서 적시했듯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 ‘여전히’ 용감하다.” 여성 서사는 더 이상 ‘시작부터 정치적인’ 서사가 되지 않을 때까지 용감하게 쓰여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더는 작고 특수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까지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75)하면서 쓰여야 한다.

오현지(인과계열 23) 학우.
오현지(인과계열 23)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