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기자 (webmaster@skkuw.com)
능금
차해원(자과계열 23)
초록아 어서 이리 와
이리 와서 나를 죽여줘
내 머리카락을 뜯어다 울창하고 빽빽한 뿌리를 만들어
가장 우월한 유전자를 가져다 핏빛의 열매를 낳아줄래
여름은 초록 너 하나의 계절
너 말고는 모두 다 질식해 죽어간다는 뜻이야 과포화 상태의 공기, 침수가 일어나는 장마에도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메말라 간다는 건
거대한 찜기에서 보내는 95일
보드랍고 촉촉하게 익어갈 사람, 새, 고양이, 버섯, 느티나무 같은 것을 떠올렸었어
96일째 되는 날에야 손끝 첫 번째 마디를 구부려 가며 기어이 감각을 되살려 내겠지만 말이야 나는
능금이 되고 싶었어
부끄럽게도 그런 영생을 꿈꾸고 있어
연두의 시절을 겪어 찬란한 초록색의 기억으로 살고 싶었어* 그러다 빨간 원피스를 꺼내 입고는 미련 없이 훌쩍 낙하하고 싶었어 그것만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식을 이끌어 낸다거나, 아니면 태양 가까이에서 날개가 녹아버린다는 결말도 꽤 낭만적이지 않니
초록 너라면 말이야
어떤 삶을 살고 싶었어?
불멸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자각할 때는 어떤 기분이 들어
너 하나만이 살아있는 그 계절은 어때
가끔은 너도 네 초록에 온통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해?
너에게 내 모두를 걸고 싶어
이리 와서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산산조각 내 줘
뼈저리게 순응할게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